○ 춘양골이야기

'억지춘양'에서 꽃피운 선비의 꿈, 만산고택

민들레@ 2010. 1. 12. 11:38

 '억지춘양'에서 꽃피운 선비의 꿈, 만산고택

2009년10월25일 오후 서울 신촌동 연세대 박물관. 전시실 입구에 ‘晩山(만산)’이라고 적힌 현판(懸板)

이 걸렸다. 한 눈에 봐도 100년은 더 돼 보였다. 231㎡(70평) 크기의 전시실에는 또 다른 현판과

그림, 사진 40여 점이 전시됐다. 이 학교 학생 뿐 아니라 주부, 어린이 등 관람객 20여명으로

전시실은 분주했다.

 

만산고택 마당
 

이번 전시는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 있는 ‘만산고택(晩山古宅)’을 그대로 옮겨 왔다. 조선말기 당상관

을 지낸 강용(姜鎔) 선생이 1878년 지은 이 집은 5대에 걸쳐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전문

가들은 이 집을 ‘조선 말기 개인 한옥 중 최고 수준의 작품‘으로 꼽는다. 연세대 박물관은 지난달

26일부터 이달 말까지 ‘선비의 꿈’이라는 주제로 이 집의 현판과 그림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회를

통해 세상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소 딱딱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에는 매일 200여 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다. 김도형(55) 박물

관장은 “이 집 현판에는 조선 말기 선비들이 꿈꾸던 세상이 글로 새겨져 있다”고 했다. 전시된 현판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살펴보던 주부 조진숙(47)씨는 “철마다 느낌이 달라 이 집을 자주 찾았다”며

“서울에서 특별전이 열린다고 해서 딸과 함께 왔다”고 했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 만산고택 전경
 

◆ ‘억지춘양’의 본산에 위치한 만산고택

호사가들이 만산고택을 설명할 때 반드시 먼저 꺼내는 얘기가 ‘억지춘양’이란 말의 유래다. 어떤 일

을 억지로 이루려는 모양을 일컬어 흔히 ‘억지춘향’이라고 한다. ‘억지로 춘향이 흉내를 내는 것’,

‘싫다는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는 것’에서 유래됐다는 그럴듯한 풀이까지 덧붙인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말은 없다. ‘억지춘양’이 옳은 표현이다. 춘양(春陽)은 ‘억지춘양’의 발원지이다.

이곳에서 나는 소나무 ‘춘양목’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뒤틀림 하나 없이 꼿꼿해 궁궐 축조나 왕족의

관(棺) 제작 때 쓰이던 최고급 목재다. ‘억지춘양’의 연원은 이 춘양목에서 비롯됐다. 다만 한 가지로

정해진 바 없이 “타지역 나무로 집을 지은 주인이나 나무상인들이나 모두 ‘춘양목’이라고 우겨서”,

“나무를 쉽게 베어가기 위해 오지인 춘양에 억지로 철도역을 만들어서” 등 다양한 형태로 구전되고 있다.

 

이처럼 만산고택은 가장 좋은 나무로 만들어진 집이다. 일반목으로 지은 대부분의 개인 한옥과는 달리

만산고택은 네 동의 건물마다 춘양목이 우람하게 서있어 첫 만남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당대 최고의

명가인 퇴계 이황(李滉), 명재 윤증(尹拯)의 종가와 혼사를 맺은 가문인 만큼 가옥의 형태와 구조는

영남지역 명문 사대부집의 전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두메산골에 위치한 덕에 맞배지붕, 팔각지붕, 우진각지붕

등 다양한 모양의 지붕은 아직 개발의 손때가 묻지 않은 춘양 산천과 사시사철 색다른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연세대학교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선비의 꿈'에 모녀관람객이 만산고택의 현판들을 감상하고 있다.

 

◆ 망국의 선비정신이 살아있는 고택의 현판

옛 사대부들의 집에는 건물 이름을 나타내는 현판이 붙어있다. 건물 이름은 흔히 집 주인의 호(號)나 좌우명

으로 쓰이기도 한다. 집에 주인의 인격을 투영하려는 한자문화권의 독특한 특징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만산’이라는 현판 역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대기만성의 큰 인물이 되라”며 친필로 하사한

강용 선생의 호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며 호를 바꿀 것을 결심했다.

얼마 후 ‘정와’(靖窩, 고요한 움집)라고 쓰인 현판이 사랑채에 붙었다. 바깥 일과 절연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다는 의지를 호와 현판으로 표현한 것이다.

'선비의 꿈' 포스터

 

손님이 드나드는 별당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애국지사 오세창(吳世昌)이 쓴 ‘칠류헌(七柳軒)

’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숫자 7은 천지 기운(月火水木金土日)의 순환을 의미한다. 여기에 관직을

고사하고 버드나무를 키우며 은거한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해 ‘천운이 순환하듯

쇠한 국운이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는 은자의 집’을 표현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李垠)이 친필로 내린 ‘한묵청연’(翰墨淸緣, 문필로 맺은 맑고

깨끗한 인연)이라는 현판은 황족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던 강용 선생의 인간적인 안타까움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위당 정인보(鄭寅普) 선생은 강 선생의 우국충절을 담은 문장에 대해 “애통하여 차마

다 읽지 못하겠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아들과 손자는 독립운동으로 가문의 선비정신을 이어갔다. 아들 강필(姜泌)은

유림단 사건을 주도한 심산 김창숙(金昌淑) 선생을 도와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에 나섰고, 손자 강만원

(姜晩元)은 광주학생운동의 열기 속에 서울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이들 부자 모두 일경에 체포돼

고초를 겪고 독립유공자의 반열에 올랐다.

 

현재는 강용 선생의 4대손인 향토사학자 강백기(65)씨 내외가 노모를 모시며 살고 있다. 강씨는 5년 전부터

고택을 개방해 한 해 수천 명이 잠시나마 선비의 생활을 체험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종손으로서 제사를

연간 10여 번을 지내야 합니다. 하지만 보람찹니다. 옛것이 소멸되고 왜색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우리 문화를 지킨다는 강한 사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130여 년 전인 고종 15년(1878), 당상관(정3품 이상 고급관료)을 지낸 강용(姜鎔, 1846~1934) 선생이 건립한 이래 5대에 걸쳐 보존되고 있는 경북 봉화군 춘양면 만산고택(晩山古宅). 전문가들로부터 “현존하는 조선말기 개인 한옥 중 최고 수준의 건축미를 지녔다”고 평가받고 있는 곳이다. 연세대 박물관에서는 10월 26일부터 ‘선비의 꿈’이라는 주제로 이 고택의 현판(懸板)들을 전시하고 있다. 만산고택의 현판과 유물이 전시회를 통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도형(55) 박물관장은 “선비의 청아한 모습과 어울리는 가을을 맞아 그들이 꿈꾸던 세상을 표현한 현판을 모아 전시했다”면서 “만산고택을 지키던 현판은 현대인들이 놓치고 있는 소중한 정신적 가치를 일깨워준다”고 개최 취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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