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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충북 ▷일정 :1일 ▷위치 : 충북 괴산 ▷주요 포인트 : 청결고추유통센터, 홍범식 고택, 충민사, 수옥정, 조령산자연휴양림, 화양구곡 ▷코스 : 중부내륙고속도로 괴산IC → 청결고추유통센터 → 홍범식 고택 → 충민사 → 수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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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槐山)은 ‘느티나무(槐木)가 많은 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대로 곳곳에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명산으로 가득한 고장이다. 하늘을 배경으로 마을마다 우뚝 선 느티나무와 병풍처럼 둘러앉은 명산들이 저도 모를 평안함으로 방문객을 감싼다. 작은 여울들이 모여 괴산읍을 가로지르는 괴강은 그 아름다운 풍광에 운치를 더한다. 벽초 홍명희에 의해 다시 태어난 임꺽정은 벽초의 고향인 괴산이 궁금해졌다. 느티나무 정령인 괴령(槐靈)의 길 안내로 떠나는 괴산여행은 괴산의 중심부에서 시작된다. |
도심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에 감탄하며 괴산군 청결고추유통센터로 들어서면 한 번 더 놀랄 준비를 해야 한다. 센터 바로 옆에 괴산군민이 모두 먹을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분량의 밥을 지을 수 있다는 초대형 가마솥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둘레 17.85m, 높이 2.2m, 무게 43.5톤이나 되니 힘자랑 꽤나 한다는 임꺽정도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게가 14톤이나 되는 뚜껑을 한 번 열려면 크레인을 이용해야 한다. |
“이게 가마솥입니까?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여기다 밥을 지었으면 우리 산채 식구들은 몇 날 며칠 잔치를 했겠네요. 허~” |
가마솥 양 옆으로 세워진 다리로 오르니 솥뚜껑의 고리 역할을 하는 두 마리 용의 형상이 있다. 용의 입을 통해 김이 빠져나올 때면 용이 불을 뿜는 듯하다. 뚜껑과 겉면에 새겨진 열두 마리의 거북과 무궁화 등의 상징은 그 조화로운 그 느낌이 어찌 보면 작은 거북선 같기도 하다. |
이런 초대형 가마솥을 만든 것은 ‘군민이 함께 한솥밥을 먹듯이 화합을 다지며, 고장의 풍요와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서였고, 괴산군민이 4만1천 명인 점을 감안해 4만 명 분량의 밥을 지을 수 있는 가마솥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밥을 지을 수 있는 것일까? 물론이다. 아직 밥은 지어보지 않았지만, 팥죽도 쑤어봤고, 옥수수도 감자도 쪄서 잔치를 벌였더랬다. 특히 옥수수축제 때에는 단연 인기를 끌었다. 설계 당시부터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했다. 뚜껑의 무게로 인해 압력솥의 역할을 하게 되어 있으므로 김이 빠질 수 있는 배출구를 만들고, 열두 개의 아궁이에서 불을 지필 수 있도록 했다. |
“그런데 괴산 사람은 열둘이라는 숫자를 꽤나 좋아하나 봅니다. 아까 거북이도 열두 마리라더니 아궁이도 열둘이네 그려.” |
“열둘이라는 수는 괴산군과 11개 읍면을 상징하네. 열 두 개의 아궁이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오듯 고장의 발전과 번영과, 고향을 빛낼 많은 인재의 배출을 염원하는 것이지.” 아니나 다를까 각 아궁이에는 맨 앞에 ‘괴산군’이라 써 있고, 나머지 아궁이들에는 괴산읍, 감물면, 장연면 등의 괴산군 소속 면의 이름들이 써 있다. 가마솥 안에는 군민의 염원을 증명하듯 사람들이 소망을 담아 던져 넣은 동전들이 반짝이며 빛을 내고 있었다. |
씩씩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앞서 걷던 임꺽정이 갑자기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선다. 머리를 긁적이는 그의 뒤로 보이는 것은 지붕 위로 우뚝 선 청결고추유통센터를 홍보하는 캐릭터 선전물. 다름 아닌 임꺽정이 한 손으로는 고추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있는 모습이다. 어찌 그리 꺽정의 특징을 잘 잡아냈는지 모르고 봐도 ‘이거 임꺽정이구나.’ 싶다. |
괴산은 군 전체의 60%가 임야로, 밭작물이 많이 재배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고추는 대표적인 작물이다. 괴산은 해발 250m의 산간고랭지로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많아 고추 색상이 선명하고 산뜻하며, 맛과 향이 뛰어나다. 고추의 맛과 향을 잘 살리기 위해서는 온도와 습도, 토양이 중요한데 천혜의 조건을 갖춘 괴산은 최상품의 고추를 생산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
게다가 94년부터 공급되어온 고추세척기를 통해 잔류농약을 제거할 수 있으니, 말 그대로 ‘청결고추다운 청결고추’인 셈이다. 또한 청결고추의 명품화를 추진하면서 ‘임꺽정 고추’, ‘게르마늄 고추’, ‘참숯․ 태양초 고추’, ‘스테비아 고추’ 등의 상품을 개발해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더욱 넓혔다. |
전시장으로 사용되는 1층 로비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홍보 캐릭터를 보고 머쓱해 하던 임꺽정이 갑자기 큰 목소리를 돋우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
“이게 바로 임꺽정 고추지요? 예로부터 매운 것을 많이 먹어야 힘이 세고 건강하다고 했어요. 내가 힘이 센 이유를 알겠네요. 우하하하” |
자신의 이름을 딴 고추를 보니 무척 흐뭇한 모양이다. 고추는 귤의 2배, 사과의 20배에 가까운 비타민C를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한여름 더위에 지칠 때면 풋고추 한두 개로 기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항암작용을 하는 베타카로틴, 식욕 증진과 장내 살균, 보온 등의 효과가 있는 캡사이신이 들어 있어 기운 센 장수의 애호식품으로 손색이 없다. |
임꺽정 고추는 고추가 크고 과피가 두꺼워 고춧가루양이 많은 다수확 품종이다. 병충해에 강해 타품종과 확실히 구별된다. 특히 괴산지역에 잘 적응되는 품종이며, 풋고추는 초록색이 연하다 |
청결고추유통센터는 크게 직판장과 로비전시실, 교육장 등으로 나뉘어 있다. 직판장에서 나오자 전시실이 눈에 들어온다. 제 1전시실은 세계 곳곳에서 고추가 발견된 역사와 문헌들, 우리나라 고추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나 여러 가지 고추에 관한 문헌들은 우리나라에 고추가 처음 들어온 시기와 경로 등을 역사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
제 2전시관은 괴산청결고추의 비전을 보여주는 곳으로, 이제까지 청결고추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 결실을 맺어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고추분재와 육묘포트들을 전시해 두고 고추의 영양, 성분 등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고추로 만든 다양한 음식은 이제까지 우리가 생각해 왔던 고추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음식을 보더니 임꺽정이 연신 입맛을 다신다.
“어떠십니까? 우리 괴산청결고추의 우수성을 충분히 아시겠지요? 우리 괴산청결고추유통센터는 체험교육장으로도 그만이랍니다.”
그다지 학구적인 인물이 아닌 임꺽정 역시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견학의 효과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
○ 위 치 :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236-4번지 ○ 관람시간 : 평일(오전 9시 ~ 오후 6시) 주말(오전 10시 30분 ~ 오후 4시) ○ 휴 관 일 : 설날, 추석 ○ 문의전화 : 043-830-3377 ○ 홈페이지 : www.gsgoch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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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홍범식 고택 - 민족의 투혼이 살아 숨 쉬다 |
괴산은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 중 가장 큰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이가 바로 벽초 홍명희.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가 태어나고 자라난 고향, 괴산에서는 임꺽정의 존재감이 곳곳에 느껴진다. 동행한 임꺽정이 위대한 역사 속 인물로 살아나는 순간이다. |
중문(中門)을 가운데 두고 안채와 사랑채를 양쪽에 배치한 좌우대칭의 평면구조인 고택은 정남향으로 지어져 따스한 햇살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생가의 뒤쪽으로 위치한 산과 함께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는 고택은 꽃피는 봄이나 눈 쌓인 겨울이면 더욱 아름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3년 전만 해도 안채와 그 밖의 부속건물은 모두 없어져 밭으로 변했고 사랑채로 쓰였던 1동과 담장 일부만이 남아 있었으나 복원을 하는 중이다. 복원공사 중이어서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없음이 한스러웠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볼 때 결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
“어라, 그런데 내가 살던 곳의 집들하고는 뭔가 좀 다른 거 같습니다.” |
반가운 듯 앞장서서 가던 임꺽정이 되돌아와 하는 소리다. 조선중기와 후기, 중부와 남부의 가옥구조가 다르니, 조선 중기에 살았던 그가 조선 후기의 가옥을 보고 낯설어하는 게 당연하지 싶다. 이 고택은 조선후기 중부지방의 대표적인 가옥양식이다. |
지붕에서 발견된 기와의 “雍正八年四月(옹정팔년사월)”이라는 명문은 이 집이 1728년에 지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대들보에도 숭정기원후 85년 戊申이라고 씌어 있어 1728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조선 선조(宣祖)때 김정승(金政丞)이 지었다고 전한다. 헌종(憲宗)때 기병사(奇兵使)가 인수하여 살다가 철종(哲宗) 11년(1860)부터 홍판서(洪判書)가 살았다고 하니 홍씨 일가가 둥지를 튼 것은 이때부터가 아닐까 한다. |
사실 한 집에 여러 가지 역사적 흔적이 살아 있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보통 ‘누구의 생가’라고 하면 그저 1대에 거친 그 사람의 생애를 돌아볼 뿐인 것은 이러한 이유다. 하지만 홍범식의 고택은 다르다. |
‘풍산 홍씨’는 조선의 명문사대가로 노론의 계보를 잇는다. 노론이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세월이 길었던 만큼 역사 속에서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는 인물들 역시 많다. 사도세자의 장인이었던 홍봉한에서, 혜경궁 홍씨, 홍국영, 그리고 홍명희의 아비인 홍범식과 홍명희 등. |
홍범식은 1910년 금산군수를 지내다가 경술국치를 맞아 비통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가장 먼저 자결한 인물로 유명하다. 부임한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했었다고 한다. 홍범식의 시신을 금산에서 괴산으로 옮겨왔을 때에도 괴산의 길목마다 통곡소리가 났다고 할 정도이다. 유서에는 ‘훗날에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마라’는 것과 ‘죽을지언정 친일하지 말라’는 당부의 글이 있었다. |
아버지의 자결은 홍명희의 생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반일의 태도를 견지했다. 1888년 7월 풍산 홍씨의 장손으로 태어난 홍명희는 한학뿐 아니라 신학문에도 뛰어났다. 문학과 사회, 정치, 문화, 경제, 과학 등 전 영역에 걸친 폭넓은 지식은 당대의 뛰어난 지성으로 인정받으며, 일본유학길에 만난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와 함께 ‘한말의 삼재사’로 일컬어졌다. 문득 사랑채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진 홍명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하다. |
1919년 3월 17일 홍명희는 자신의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집필 중이었다. 서울의 독립 선언을 준비하던 이들과는 사전 연락이 없었다. 아우 홍성희와 숙부 홍용식, 홍태식만이 오가며 조용한 발자취를 남길 뿐이었다. |
‘민족자결은 힘들다. 하지만 조선 민족의 의기를 보여 참정권과 대우 평등, 언론의 자유 등을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적인 목표다.’라는 생각으로 시위를 준비하던 홍명희는 자신이 속한 공간과 위치에서 무엇이 최선인지 알고 있었다. 18일까지 이 은밀한 움직임은 지속되었고, 마침내 19일 괴산 장날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충북 지방에서의 최초의 만세 시위였다. |
홍명희의 목소리를 시발로 곳곳에서 퍼져 나오던 외침들. 하지만 홍명희와 만세 시위에 가담한 20여 명은 검거되고 말았다. 다음 장날인 24일 아우 홍성희는 다시 만세 시위를 일으킨다. 그리고 만세 시위는 곧 충청북도 일원으로 확산되었다. 민족의 갈망이 표출되어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 홍명희는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지향한 민족해방운동을 선택했다. 홍명희의 투옥으로 집안이 몰락하자 홍명희는 가족을 이끌고 셋집살이를 시작한다. 이렇게 그는 30여 년 울타리가 되었던 고택과 이별하게 되었다. |
“참나~ 정말 서러운 세월이었겠소. 나 같았으면 일본 놈들을 싹 집어던졌을 텐데…. 벽초 선생이 괴산에서 살아, 이곳에서 <임꺽정>을 집필했다면 더 좋았을 뻔 했소. 그랬다면 완성된 <임꺽정>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
임꺽정의 볼 메인 소리를 듣자니 홍명희의 고된 삶이 더욱 가슴이 아프다. 1928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임꺽정>은 세 차례나 중단되었고 광복 후 미완의 상태로 총 10권이 간행되었다. |
○ 위 치 :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 문의전화 : 043-830-3444 |
충민사는 충무공 김시민의 사당을 모신 곳이다. ‘충무공’이란 호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나라에 목숨을 바쳐 충성한 무인이었다. 김시민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대첩에서 3천8백의 군사로 열 배에 달하는 3만 대군을 물리친 명장이다. 1554년에 태어나 39세의 젊은 나이에 전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
“일본 놈들이 이런 전쟁을 일으키다니, 가슴에 불덩이가 치밉니다. 나야 나라님하고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왜놈들이 쳐들어왔다면 일단은 나라부터 지키고 보지 않았겠소? 이 양반 참 마음에 드는구먼.” |
자신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라고 반색을 하던 임꺽정이 예의 그 비분강개를 터뜨리다가 이내 호탕한 성정을 드러낸다. 그리고는 그의 삶에 대한 호기심으로 열심히 걷기 시작한다. |
고개를 드니 왼쪽에는 충민사요, 오른쪽에는 작은 사당이 있다. 사당의 이름은 충렬사. 김시민의 숙부인 김제갑(1525-1592)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충렬사다. 이를 구(舊)사당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원래 지금의 충민사 자리에 충렬사가 자리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충렬사에 김시민의 위패를 함께 모셨는데 1979년 충민사를 중건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
김제갑 장군이 원주목사로 부임해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영원산성에서 항전했으나 결국은 원주성이 함락될 때 전사했다고 한다. 그 3일 후 부인이 산성에서 뛰어내려 자결하고 아들 시백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싸우다가 역시 전사했다. |
장군의 나라를 위한 충(忠)과 남편에 대한 부인의 열(烈), 자식의 효(孝)가 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여, 조정에서는 선조가 직접 쓴 어필현판(御筆懸板)과 `一隅孤城萬古三綱(일우고성 만고삼강)`이란 편액을 내렸다. ‘외로운 옛 성에서 지아비가 나라를 위해 죽고, 그 아들은 아비를 위해 죽고, 아내는 지아비를 따라 죽었으니 만세에 전할 삼강(三綱)이다’라는 뜻이다. 원주에 있던 사당은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손되었으나 현판은 자손이 보존해, 현재 괴산의 충렬사에 걸려 있다. 일반에게 개방되지는 않아 눈앞에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하지만 충민사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난 충렬사로 가는 길은 경관이 좋아 산책로로도 그만이다. 꺽정은 사랑하던 운총이 생각나는 듯 지그시 눈길을 내린 채 길을 걷는다. |
충민사 정문을 향하다 보면 홍살문이 걸린 충무교를 지나게 된다. 이 충무교 밑을 흐르는 내(川)가 바로 병천천. 병천천에는 소년 김시민의 일화가 전해진다. |
김시민이 아홉 살 때의 일이라고 한다. 당시 부락을 감아 돌던 병천천에는 물에 잠긴 바위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바위 안의 굴에 이무기가 살았던 것. 이무기는 수시로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가축에 해를 끼쳤으니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장난꾸러기 소년 김시민은 무서워하기는커녕 이무기를 물리칠 방법을 궁리하였다. 어느 날 소년 김시민이 ‘이무기는 뽕나무 활에 쑥대화살로 쏘아 잡는다’는 고사를 읽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몰려가서 이무기를 활로 쏘아 없애버렸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병정놀이를 좋아했으며, 병정놀이를 하면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하기를 즐겼다니 성정을 알 만하다. |
충무교를 지나며 병천천을 내려다보니 웃음이 절로 번진다. 꺽정과 웃는 눈빛을 교환하며 충무교를 지나 충민사 정문을 지나니 경내의 괴석(怪石)들이 우리를 맞는다. 크고 작은 돌들이 나란히 줄을 맞춰 서있으니 임꺽정은 힘자랑을 하려는지 돌을 안아 들어 올리려는 태세다. 문화재를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며 간신히 말리는 괴령이다. |
석조계단을 오르면 앞에서부터 자연경사를 따라 효충문이라 불리는 외삼문, 선무문으로 불리는 내삼문, 사당이 일렬로 서 있다. |
효충문(孝忠門)이라 불리는 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올린 평삼문이고, 선무문(宣武門)이라 불리는 내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솟을삼문이다. 바깥마당에는 김시민장군신도비와 월탄 박종화가 짓고 이상복이 쓴 김시민장군유적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기념비를 대하니 진주대첩 당시의 상황이 떠오른다. 장군이 진주판관으로 부임하여 덕을 베풀며 공명정대하게 다스리니, 백성들은 평안한 세월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부임한 지 1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다. 때마침 진주목사 이경이 병사하자, 진주목사 대행으로 임명된 김시민 장군은 병사를 모집하고 맹훈련을 시켰을 뿐 아니라 병기와 자재를 정비하고 양곡을 비축하였다. 진주성은 호남의 길목에 있으므로 절대로 이곳을 내어줄 수는 없다는 각오였다. |
병력은 3천8백 명이 전부였으나 진주성민들의 단결과 곽재우, 최강 등 의병의 활약, 죽기를 각오한 필사의 결전의지는 3만의 적군 중 2만의 사상자를 내는 대승을 거두게 하였다. 하지만 전투가 거의 끝나가던 1592년 10월 9일, 김시민 장군은 죽은 척 위장한 채 숨어 있던 왜병의 총탄에 전사한다. |
이렇게 추모비가 많은 것을 보니, 정말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다며 임꺽정이 부러움 반, 시샘 반의 눈빛을 보내자 괴령은 위로의 한 마디를 던졌다. |
“자네는 그래도 책으로 만들어져 후세 사람들이 당신의 삶 구석구석을 이해하지 않았나?” 그러자 다시 그 호탕한 웃음을 허허 웃는다. |
사당에 걸린 김시민 장군의 영정에 배향하고 사당 뒤에 위치한 김시민 장군의 묘역에까지 참배한 후 뒤돌아 나오며, 괴령은 800여 년 느티나무와 함께 살면서 보아온 무수한 삶에 대해 경건함을 느끼고 있었다. |
○ 위 치 :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57 ○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 ○ 휴 관 일 : 연중무휴 ○ 문의전화 : 043-830-3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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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수옥정 - 비경 속에 스민 역사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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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천하>와 <다모> 등 드라마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더욱 유명해진 수옥폭포. 칼로 자른 듯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서 질주하듯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가 비경을 이룬다. 폭포가 만들어내는 포말은 잘게 부서지면서 사람들에게 달려든다. 물이 많을 때에는 수세에 놀라 손을 담그기도 어렵지만, 평소에는 깊지 않은 수심과 세지 않은 물살이라 가족이 함께 물놀이를 즐기기에 그만이다. 물론 폭포의 물줄기가 바로 떨어지는 곳은 수심이 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게다가 연풍면 원풍리 큰길가에 위치해 있어 찾기가 쉬우니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밖에. 15m 높이에서 3단으로 나뉘어져 떨어져 내리는 물살은 한 폭의 그림이 된다. |
수옥폭포 가는 길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서 보면 숨어 있는 보물이 있다. 3번 국도와 헤어져서 수옥폭포 방향으로 조금 가다 보면 오른쪽에 표지판 하나가 서 있는데, 괴산 원풍리 마애불상군이 그것인데, 지나치기 쉬운 자리에 있어 별 것 아닌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보물 제 97호이다. |
그런데 오늘, 그 마애불의 심기가 불편하다. 오늘도 길 건너편 수옥폭포에는 일가족이 놀러와 물놀이가 한창이다. 멀리서도 깔깔대는 웃음소리와 첨벙이는 물소리는 경쾌하게 귓가를 간지럽게 한다. 수옥폭포에서 고갯길 위로 더 올라가면 수영장까지 있어서 수영장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의 소리까지 합세했다. |
인자한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형 마애불은 입가에 퍼지는 미소를 막을 수가 없다. 하지만 동생 마애불은 마냥 좋지만은 않다. 조용히 명상에 잠기고 싶은 시간에도 방해를 받는 것이다. 더군다나 고갯길에 수영장이 생기면서 사람들의 북적거림은 여름철이면 도가 더해진다. |
“도대체 인간들이란 조용히 감상하는 법을 몰라. 물이 있으면 무조건 뛰어들고 보는 건가. 소리는 또 왜 그리 질러대는지, 오늘도 명상은 물 건너갔네. 으이구~” |
동생의 투덜대는 소리에 형 마애불이 눈길을 돌린다. |
“행복하고 좋아서 그러는 거야. 아이들이야 늘 시끌벅적한 거지. 그래야 건강한 아이들인 거야. 자연을 즐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야.” |
여전히 얼굴을 찡그린 채 수옥폭포를 외면하는 동생마애를 보면서 형 마애불은 안쓰럽다. 선을 이루는 것은 인간 세계와 떨어져서 이룰 수 없는 것인데…. |
“선을 이루는 건 인간들의 삶을 이해해야만 가능한 거야.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봐. 해탈의 경지는 형식적인 수양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지구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루어지는 거야. 명상을 해야 한다는 것도 너의 욕심인 거지. 아이들의 웃음 속에서 행복을 찾아봐.” |
그제야 찡그린 눈살을 제대로 펴는 동생마애.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새소리처럼 느끼고자 애쓰기 시작한다. |
아이들의 웃음소리 끊이지 않는 수옥폭포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이야기가 있다. 쇠약해진 원나라에 대항하는 뜻으로, 변발과 호복 등 몽고풍을 없애고, 내정간섭을 일삼는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폐지하는 등 원나라 배척운동을 벌이는 한편,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시키는 등 끊임없이 개혁정치를 실행한 공민왕은 지쳐 있었다. |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기를 쓰고 반대하는 귀족들과의 신경전도 공민왕에겐 골칫거리였다. 그때 홍건적이 쳐들어왔다. 홍건적이 도성까지 침입하게 되자 공민왕은 급히 행장을 차리고 피난의 길을 나섰다. 인근의 상암사로 피신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폭포 소리에 이끌려 닿게 된 곳은 다름 아닌 수옥폭포였다. |
깎아지른 절벽으로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는 그야말로 비경이었다. 뿐인가. 두부 자르듯이 반듯반듯 잘려진 바위가 병풍처럼 드리우고 주변의 나무들은 폭포를 가리기라도 할 것처럼 폭포에 고개를 드리우고 있으니, 그 울창한 숲이 천연의 요새를 만들어주었다. 공민왕은 ‘바로 이곳이다.’ 싶은 생각에 말에서 내렸다. 머물러 보니 더욱 좋았다. |
그 동안 머리를 짓누르던 문제들도, 홍건적에게 쫓기던 현실도 모두가 가벼이 여겨지고 머릿속이 맑게 개는 것만 같았다. 술 한 잔 손에 들고 발을 물에 담그니 신선계가 예가 아닌가 싶다. 편히 쉴 곳을 마련하기 위해 정자를 짓도록 분부하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담한 정자 하나가 그림처럼 자리를 잡았다. |
“자, 오늘부터 내가 여기서 지낼 것이다. 저 길 건너 마애불이 나를 지켜주시니 내 맘이 편하고, 아름다운 경관이 함께 하니 기분이 상쾌하다.” |
이후 이곳이 어류동(御留洞)이라고 불린 것은 이때 일에 기인한 것이다. 공민왕은 한참을 이곳에 머물다가 환궁했다. |
또 하나의 일화는 조선시대의 얘기다. 조선 숙종 때의 일이다. 경상도 율리에 사는 유장자(柳長子)가 혼인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도 자식이 없었다. 하지만 아내를 너무도 사랑하여 아내와의 사이에서 반드시 아이를 갖고 싶었다. 그러던 중 이곳의 원풍리의 마애불에게 빌면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길을 나섰다가 수옥폭포까지 이르게 되었다. 요즘은 수옥폭포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마애불을 우연히 찾게 되지만, 유장자는 마애불을 찾으러 왔다가 수옥폭포에 이른 셈이다. |
인간계인지 선계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의 묘한 기운을 지닌 수옥폭포는 마치 자신의 소망을 들어줄 듯 했다. 정자를 세우고 기도를 드리기를 수 일, 정말 기도가 효험이 있었던 것인지, 아름다운 경관 속에서 행복한 마음으로 사랑을 해서인지 결국은 자식을 얻게 되었다. 정자의 이름은 수옥정으로 수옥폭포의 빼어난 경관과 어울려 많은 이들이 찾게 되었다. 절벽에 새긴 글씨는 1711년 숙종 37년에 세웠던 것을 증명하고 있다. 지금의 수옥정은 1960년 낡아 없어진 수옥정의 자리에 관광지 개발을 위해 마을 유지들이 팔각정을 세우고 옛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
동생 마애는 수옥폭포와 수옥정에 얽힌 두 가지 이야기를 들으며 인간이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바동거리며 살아갈 때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이 그 바동거림에서 벗어나는 순간 이루어지고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그러자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물장구 소리는 산새의 지저귐처럼 자연의 일부분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
연곡리에서 수옥폭포로 가던 길이라면 왼쪽으로 길을 들어 괴산 원풍리 마애불좌상을 만나고 선문답을 주고받음이 어떨지. |
○ 위 치 :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 문의전화 : 043-830-3421 |
조령산은 백두대간을 넘는 고개로,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조령 제3관문은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었으며, 옛 선비들이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한양으로 갈 때 넘나들던 새재 과거길이 있어 당시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
조령산자연휴양림은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 맑은 계곡물이 어우러져 천혜의 자연환경을 제공한다. 신선봉과 마패봉을 잇는 3.4km의 등산로는 등반객들에게 인기다. 숲속의 집, 20여 명이 사용할 수 있는 단체숙소, 삼림욕장 등은 편안한 휴식공간을 제공한다. 특히 눈썰매와 물썰매를 즐길 수 있는 사계절 썰매장은 행복한 추억을 만들기에 제격이다. 일일 최대 1천6백 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며 인터넷으로 예약 후 이용 가능하다. |
○ 위 치 :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산 1-1 ○ 문의전화 : 043-833-7994 ○ 홈페이지 : www.cbhuyang.go.kr/joryeongsan |
청주에서 동쪽으로 32km, 괴산 선유동계곡과 7km 거리에 있으며 1975년 국립공원에 포함되었다. 조선 중기에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떠 화양동에 구곡을 이름지었다고 전해진다. 화양동은 원래 황양나무(회양목)가 많아서 황양동이라고 불렸으나 선생이 중화의 ‘화’와 일양래복의 ‘양’을 따서 화양동으로 고쳐 불렀다.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료암, 학소대, 파천을 일러 구곡이라 한다. 청명한 하늘 아래 굽이굽이 펼쳐진 선경을 따라 몸도, 마음도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다. |
○ 위 치 :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402-2 ○ 문의전화 : 043-832-4347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