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남은 옛길 - 아름다운 죽령 옛길 |
죽령, "령"은 큰 고갯길을 뜻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령이 죽령과 조령, 추풍령이다.
영남지방이란 한양에서 보았을 때 령의 남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말이다.
죽령 옛길은 풍기 수철리에서 죽령정상까지 이어지는 옛날길이다.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마지막으로 남은 잘 보존된 옛날길이다.
지금이야 고속도로 터널로 불과 몇 분 만에 지날 수 있는 길이지만
그 옛날엔 그야말로 구비 구비 애환서린 고갯길이었을 터이다.
민초들의 애절한 사연이 넘나들던 고갯길,
출세의 꿈을 안고 한양을 향하던 고갯길,
이런 저런 전쟁의 현장이었던 고갯길,
큰 인물들의 한 맺힌 귀양과 낙향을 지켜 본 고갯길이었을 터이다.
역사적 의미는 차치하고라도 구비 구비 이어지는 길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파릇파릇한 봄빛과 어울려
동화 속을 거닐듯 꿈속을 거닐듯..... 예쁘기 그지없다.
더욱이 수철리에 작은 간이역 희방사역이 있다.
인적 없고 작아서 더욱 정감 가는 곳이다.
가끔 기차가 지나는 철길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수철리 죽령 옛길 입구
수철리 희방사역, 옛길과 더불어 간이역과 철길이 있어 운치를 더 한다.
꽃피는 마을 수철리 전경
거대한 중앙고속도로가 옛길위를 교량과 터널로 지난다.
왠지 상념에 젖게한다.
풍기는 어디고 온통 사과밭이다. 파릇한 초록빛이 인상적이다.
구비구비 이어지는 꿈길 같은 옛길
뒤 돌아 본 옛길 아래 풍기시내가 희미하게 보인다.
보존된 옛길의 종점 죽령 정상에있는 죽령 주막
상세안내(영주시 제공)
소백산 제2연화봉과 도솔봉이 이어지는 잘록한 지점에 자리한 해발 696m의 죽령.
삼국사기에 『아달라왕(阿達羅王) 5년(서기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고, 고개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竹竹祠)이 있다고 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온갖 애환이 굽이굽이 서려있는 죽령은 삼국시대 한동안 고구려의 국경으로 신라와 대치, 삼국의 군사가 뒤엉켜 치고 쫓기고 엎치락 뒤치락 불꽃튀는 격전장이기도 했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 말년(서기 470년경) 신라 진흥왕 12년(서기 551년) 왕이 거칠부(居漆夫) 등 여덟장수를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략, 죽령이북 열 고을을 탈취했으며, 그 40년뒤인 영양왕 1년(서기 590년) 고구려 명장 온달(溫達)장군이 왕께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등의 기록(삼국사기)으로 당시 죽령이 얼마나 막중한 요충이었음을 짐작할 만합니다.
서기 1910년대까지도 경상도 동북지방 여러고을이 서울 왕래에 모두 이길을 이용했기에, 청운의 뜻을 품은 과거선비, 공무를 띈 관원들이며, 온갖 물산을 유통하는 장사꾼들로 사시장철 번잡했던 이 고갯길에는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객점, 마방들이 목목이 늘어 있었습니다.
죽령(竹嶺)옛길은 장장 2천년의 유구한 세월에 걸쳐 우리나라 동남지역 교통 대동맥의 한 토막이었던 길입니다. 이 길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이 끊겨 수십년 동안 숲과 덩굴에 묻혀 있었습니다.
역사의 애환을 간직하며 2천년 가까운 세월, 영남 내륙을 이어온 죽령의 옛 자취를 되살려 보존하려는 뜻에서 1999년 영주시가 희방사역에서 죽령주막까지 1시간 정도(2.5km)걸리는 길을 복원하였습니다. 울창한 숲의 나무과 산새, 다람쥐 등이 반기는 산길을 걸으며 선인들의 발자취를 느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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