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양골이야기

춘양의 유래와 지명

민들레@ 2008. 4. 6. 21:22

의양1리(宜陽)

    ▷ 솥골, 솟골, 정곡(鼎谷) : 춘양면 소재지에서 북서쪽 약 1km정도 떨어진 골짜기에 위치하며 동리를 이루고 있는 산이 솥을 건 모양과 같다하여 정곡이라 불렀으며 일설에는 솥을 부어 만든 곳이라고도 하며, 금이 나는 곳이라고하여 쇳골이라고도 불리다가 솥골로 와전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솟골약수 : 앳수백년전에 발견되어 피부병, 위장병에 효력이 있다하며 사계절 일정한 량이 흐르는 것이 특징이다.

    ▷ 남산편, 남산리 :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300여m 떨어진 마을로 춘양의 남산이라 할 수 있는 산기슭에 북쪽을 향하여 마을이 형성되어있다 하여 남산편이라 부르고 있으며 지금은 춘양면 소로1리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인전ㅂ하고 있어 소로1리 일부지역까지 남산편이라 부르고 있다.

    ▷ 억지춘양 : 해방전부터 영주에서 철암까지 영암선 철도를 개설도중 8.15해방과 6.25전쟁 등을 겪으면서 지금의 방전삼거리 근방을 지나 녹동방면으로 90%이상 공사가 진행중 당시 춘양면 서벽리에 고향을 둔 국회의원 정문흠씨의 주장에 따라 춘양면소재지를 거치도록 공사계획이 변경되어 법전면 소지리와 춘양면 의양리를 잇는 터널300m와 연이어 당시 철교 공사로서는 보기드문 높이 30.7m 길이 60m의 철구조 빔다리가 놓여지는 등 우여곡절 속에 억지로 공사가 추진되어 영동선(당시 영암선)이 춘양면 소재지를 돌아가게 됨으로써 억지춘양이란 말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법전에서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춘양소재지가 한눈에 보이고 건널목에 경고하기 위한 기적이 길게 울어 마치 철마가 춘양에 다다름을 알리는 것 같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또한 80년대 초만하여도 춘양장날(4, 9일) 오전 11시에는 강릉, 동해 지역에서 싱싱한 해산물을 비롯하여 소천, 석포, 철암 등 암면 주민들이 춘양장을 보려고 기차에서 내린 행렬이 1km정도 길게 이어졌다.  

    ▷ 웃장터 : 춘양면 소재지는 버스정류장부근에서 가로가 북쪽으로 두갈래로 갈라지는데 의양1리와 2리 경계를 지나는 도로변을 윗장터라 하며 장날이면 난전이 서는 거리를 아래장터라 부르고 있다.

 ◆ 의양2리(宜陽)

    ▷ 동마, 동촌 : 약 280년전에 남양홍씨가 자리를 잡고 부락을 이루었으며, 이곳에 충정공 충제 권벌이 창건한 한수정이 있어 한수리라고도 불리었으며 춘양 소재지의 동쪽에 위치하였다하여 동마라고 한다.

    ▷ 한수정(寒水亭) : 동촌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선조 41년(1608년) 안동권씨인 권벌선생이 세워 거연정이라 칭해오다 그후에 2대손인 한 주가 찬물과 같은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는 곳이라하여 한수정이라 하였다하며, 권 벌은 이조 중종때 우찬성을 지내다 사후 영의정에 충증되었다고 한다. 한수정은 춘양 소재지 중앙에 위치하며 소나무숲속에 지어져 있으며 연못이 정자를 감싸는 형세이다.

    ▷ 싸전, 미전 : 춘양소재지이 한가운데이며, 현재 농협연쇄점이 위치한 자리에 춘양 5일시장이 형성될 때부터 쌀을 매매하는 미전으로 자리잡아 왔으나 1971년 농협이 그 자리에 들어서면서 현 위치로 옮겨졌으며 1970년대 중반까지 쌀의 매매가 이루어졌으나 그 후반부터는 농촌경기의 변동으로 쌀의 매매는 거의 볼 수 없으며 잡화상 등 난전이 장날이면 들어서고 있다.(춘양장은 4, 9일이다)

    ▷ 들마, 평촌 : 춘양시장에서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안동권씨가 자리를 잡고 일가를 형성하였으며 소재한 위치가 평지들판이라고 하여 들마라고 불리게 되었다. 남서쪽에는 의양에서 제일 넓은 들판이 있음, 현재는 춘양면사무소와 춘양 양묘사업소가 있다.

      면사무소 : 본래는 춘양면 의양리 451번지인 현재의 농협자리에 위치하였으나, 건물자체가 너무 협소하여 1989년 의양리 409-10번지 현 위치로 이전 신축하였다

      양묘사업소 : 지금부터 68년전인 1926년 조선 총독부 예하 울진영림서 춘양출장소 춘양묘포로 개소되어 국가정책의 흐름에 따라 여러번 직제가 개편되어 1996년 1월 1일자로 남부지방산림관리청 춘양양묘사업소로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총 154,271㎡의 면적에 6,300백만본의 묘목을 생산하고 있고, 청옥산자연휴양림도 관할지역에 속해 있다.

 ◆ 의양3리(宜陽)

    ▷ 낙천당 : 현마 북쪽에 있는 마을로 김해김씨가 임진왜란 이전부터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이곳에 김장군, 강장군, 곽장군 셋이서 피란하여 왜란이 끝나 한양으로 돌아갈 때 평안하고 줄겁게 지냈다고 하여 정자를 짓고 낙천당이라 하였고 마을도 함께 낙천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권진사택 : 이 건물은 성암 권철연(1874~1951)이 살던 집으로 현 위치의 건너마을 운곡에 살던 그의 부친이 1880년경 이곳으로 이주건립하였다. 문화재 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 현말, 현동, 현리 : 고려 충렬왕때에 호군 김인궤의 유공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의양리의 일부로 내려오다가 1907년 순종 1년 봉성에 있던 관가가 소실되어 이 마을에 설치되어 있다가 1913년 교통문제로 봉화에 이전 될 때까지 현이 있던 망르이라 하여 현말이라 한다.

    만산고택 : 이 가옥은 조선 말기 문신 만산 강 용(1846~1934)선생이 고종 15년(1878)에 건립하였다하며 만산 선생은 영릉참봉,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 등을 지냈으나 1905년 이후 망국의 한을 학문으로 달래며 자택 뒷산에 망미대를 쌓고 국운회복의 념을 읊었다고 한다.

    ▷ 새주막 : 현말의 북동쪽 서동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마을로 50년 전에 새로 생긴 주막이 있다하여 새주막이라고 하였으며, 일설에 의하면 주막집이 몇집 있어서 서동리와 서벽리 지방에서 춘양장을 보러올 때 주막집에서 목을 적셔가는 장소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새주막 마을 앞에는 서동천과 운곡천이 합수되는 곳이며 서동리와 세천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다. 새주막앞에는 운곡천을 가로지르는 교량이 십여년전에 새로 가설되었다.

    ▷ 괴정모티 : 현말 남서쪽 만석봉 북동쪽 밑에 있는 마을로 약 300여년전에 재령이씨가 지은 괴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괴정모티라고 불렀으며, 옛날에는 이곳에 약수가 있어 옻이 오른 사람들이 청결학 와서 물을 바르면 효염이 있다고 한다. 괴정모티는 학산리에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며, 지금도 괴정 정자가 있다.

 ◆ 춘양면 의양4리

    ▷ 운곡 : 춘양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운곡천을 건너서 있는 동네가 운곡으로 이 마을 동쪽으로 높은 산이 둘러져 있고 산위에 묘터가 있었다고 하는데 항상 구름에 가리워져 여기에 신선이 살았다고 하여 이 신선을 운중선인리라 하였다 이뜻을 새겨 구름이 덮인 골이란 뜻으로 운곡이라 부르게 되었다한다.

    현 춘양역터는 신라시대 절터였다고 하며 1950년대 영동선이 만들 때에 춘양역부지 정지작업을 하면서 매몰되어 있던 석불을 발견하여 동민들이 현 위치인 의양리 155번디에 옮겨졌으며 좌대를 포함한 불상의 높이는 2.5M 정도이며 얼둘은 듬직하고 귀는 길고 반달처럼 휘어져 있으며 체구는 뚱뚱한 편이나 전체적으로 원만한 인상을 주어 거의 완전한 석불입상으로 신라말이나 고려초인 10세기경에 만들어진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지방무노하제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운곡에는 1987년 KBS라디오중계소가 설치되었으며, 춘양시대를 가로 지르는 운곡천은 수많은 전설을 남긴체 그 발원지는 문수산, 옥석산, 태백산 지령을 분수령으로 명호면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1993년에 운곡마을 입구에 마을 표지석이 설치되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백산 정기받어 옥녀봉 솟고 산높고 골길어 수려한 산세

      오국의 인재 배출 예절의 고장 자손만대 억만년 부귀하리라

      만경대 내린물이 운곡천 이뤄 비녀쏘 거북쏘 전설 남기고

      영동선 굽이돌아 쉬어가는 곳 선조의 숨결어린 정겨운 고장

      문화와 전통이어 무궁하리라. (1993. 8 이종현)

    ▷ 내운곡, 구닛골 : 운곡마을 동쪽과 북쪽으로 위치한 골짜기에 있는 마을을 통틀어 내운곡이라고 한다. 즉 영동선 철도 너머 마을을 이르러 내운곡이라 한다. 내운곡에는 1970년대 중반에 지은 보양사라는 절이 있고 이 절 북쪽으로 4KM정도 골짜기를 들어가면 백운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이 보양사 안 법당 옆 산자락에는 샘이 하나 있는데 옛부터 이 우물을 옻물이라하여 인근에서 많이 사용하였다고 하며 지금도 아침, 저녁으로 물을 떠가는 사람들이 있다.

    보양사와 백운사 중간지점쯤에 후생촌이라는 7호쯤되는 부락이 산기슭에 서향으로 자리하여 형성된 마을이 있다.

    백운사는 내운곡 제일 깊은 골에 위치한 절로서 1950년대 들어와 옮겨진 절이다. 원래 내운곡 입구에 있었으나 인접하여 민가가 들어서서 옮겨졌다.

    ▷ 나북뜰, 나북당 : 약200년전에 나북선인의 권씨 별장이 있어 이곳을 나북당이라 하고, 옛날 나북군이 전쟁에 목이 잘려졌다하여 나북당이라는 설도 있다. 이 지역은 안동군 와단면에서 순흥군 외단면 운곡리로 되어 있다가 현재에 이른다.

    비녀쏘 : 나북당앞 운곡천에 비녀쏘와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 동점리 고�길 낙동강 상류에 동점 구무쏘 물속에는 서로 연결되는 구멍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27대 선덕왕때 효도라는 왕자가 궁중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전국을 유람하던중 재산면에서 백정의 딸 월선낭자와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서라벌에서 호출이와 왕자가 갈 때 금비녀를 주었는데 이듬해 월선낭자에게 전갈하기를 5월 단오날 삼척 구무소에서 기다릴테니 오라고 하여 찾아 가는 길에 의양리 비녀쏘에서 쉬는데 개울물이 갑자기 소용돌이 치는 바람에 놀라 물에 비녀를 잃어 버리고 그냥 구무소에 가서 왕자를 만나 비녀를 잃었다하니 왕자는 노하며 그냥 돌아가기에 눈물을 흘리며 구무소에 빠져 죽으려고 뛰어 들었는데 얼마후 정신을 차려보니 모래밭에 나와 있었고 옆에 금비녀가 있었다. 이는 하늘이 애처로운 낭자를 구하여 준 것이다. 월선은 금비녀를 들고 서라벌러가서 효도왕자를 만나 오대산에서 속세를 떠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절설이 있다.

    또한 비녀쏘에는 큰 이무기가 살고 있다는 전설도 있을 정도로 깊었으나 춘양 - 서벽간 지방도 확포장공사시 많이 매몰되어 물아래에 구멍이 막혔다는 예기도 있다.

    비녀쏘 부근에는 물이 말고 수량이 많으면서도 괴암들고 자갈밭이 넓어 각 성씨들의 화수회장소로도 많이 이용되며, 여름철이면 춘양소재지 사람들과 외지로 나간 자녀들의 물놀이 장소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있는 명소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주차시설 등 기본 시설이 없어 교통사고 위험이 커 아쉬움이 남는다.

    춘양면 의양리 운곡천에는 2~30년전만 하여도 거북쏘, 둥근쏘, 비녀쏘, 소로리쏘 등 한길이 넘는 쏘가 13~15개가 있어 국민학교만 다녀도 수영은 기본이었으나 지금은 운곡교 상류만이 수질이 좋아 수영이 가능하고 소로리는 시내에서 나온 생활하수로 많이 오염되어 있어 예전처럼 수영을 할 수는 없다.

 학산리(鶴山里)

    ▷ 새시골, 효동, 조당 : 의양리에서 학산으로 가는 첫째 마을로 천조봉 남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 모양이 새같이 생겼다고 새시골이라 한다. 이곳 남서쪽에 위치한 곳에 부처가 있었다는 부처직골과 천마봉 산 기슭에 범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도장골 : 곡식을 넣어두는 방을 도장이라고 하는데 이 마을에서 곡식이 많이 나는 곡창지대라하는데서 연유한 이름이다.

    ▷ 골띠, 골둔리 : 중조의 동쪽에 있는 마을로 참꽃이 피었다고 하며, 또 풀이 많이 돋는다 하여 초곡 또는 골띠라고 한다. 골띠에서 남쪽 학산 건너편에 법전면 소지리의 고루골로 넘어가는 골띠재와 서동리 노싯골로 넘어가는 노실재가 있다.

    재궁골 : 산골짜기 평지에 남동향으로 위치한 마을로 안동권씨 독야파의 재궁이 있다고 하여 지궁골이라고 한다. 마을앞에는 넓은 솔밭이 있고 학소천이 흐르고 있으며, 일대에는 송이버섯이 많이 나고 있다.

    와선정 : 임진왜란 당시 5인의 현인들이 피난왔던 자리로 이곳에서 의형제를 맺고 의리를 다졌던 곳으로 후손들이 정자를 짓고 관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일면 오현정이라고도 하며 신선이 쉬어갔다하여 와선정이라고 한다. 오인의 성씨는 강씨, 정씨, 홍씨(2명), 심씨 라고 전해진다.

    ▷ 중마, 중새목, 중조  : 의양에서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로 산기슭이 남동향으로 펼쳐져서 학산 전역의 모양이 새같이 생겼으며, 그 새모양의 중간 부분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새복이라고 한다.

    ▷ 상새목 : 학산리 제일 위쪽에 있는 마을로 바지산밑 기슭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애당리 신기로 넘어가는 고개에 서낭당이 있다는 당고개와 봉성면 우곡리 중대골로 넘어가는 우실재가 있다.

 ◆ 춘양면 서동리(西洞里)

    ▷ 염장 : 서당골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옛날 소금장수가 많이 살았다고 하여 염장이라 불렀다 한다. 이곳 염장에서 본서동과 거포사이 모퉁이에 활씨의 열녀비가 있었다고 한다.

    ▷ 본서동 : 춘양중고등학교로부터 서쪽으로 약 3KM떨어진 마을로서 주로 과수와 담배를 많이 배재하고 있다. 옛날에 서당이 있어 서당골이라하였으나 본서동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당촌, 서동 : 옛날 학동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어서 서당골이라 하였다. 이곳은 안동군 춘양면 지역으로 조선조 광무 10년에 봉화군에 편입후 1914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거곡리 상촌 일부와 순흥군 와단면의 운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서동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범바우 : 마을 북쪽에 있으며 범이 살고 있어서 범바위라 한다. 일제 말엽에 안동김씨로 대현리 백천동에 살고 있는 분과 염장에 살고 있는 형제가 덫을 높아 범을 한 마리 잡았는데 그후 밤이 되면 범의 눈빛같은 불과 울음소리에 마을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다 한다.

    ▷ 서원마, 상촌리 : 이곳은 신라 문무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람화사가 있었으나 석현2리 절골로 이전되었으며(각화사), 당시 절 유적으로 보물제52호인 서동리 삼층석탑이 춘양중고등학교 교정에 남아있다. 옛날에 이 부근에 진성이씨 서원이 있었다하여 서원마라고 한다.

    탑들 : 춘양중고등학교 옆에는 넓은 들이 형성되어있는데 삼층석탑 옆에 있는 들이라하여 탑들이라 불려졌으며, 들은 약 20ha 정도 된다.

    ▷ 걸싯골, 거곡 : 춘양중고등학교 뒤편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로 음지마을과 양지마을로 구분되고 있다. 골입구 둥근 바위가 있는데 옛날에 어떤 스님이 "봉암동천"이라 새겨놓았다 한다.

    ▷ 거포골, 거포, 거호 : 서동 남쪽에 있는 마을로 거포재는 거포에서 새터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거호라 하는 것은 진주강씨가 묘를 호걸형 묘터에 쓴데 연유한다. 그 묘를 쓰고부터 그 후손들이 매우 번창하였으며 후손들이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매년 음력 시월달에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이 마을에는 사과가 많이 재배하여 거포사과라고 하는데 그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 춘양면 석현1리(石峴1里)

    ▷ 미찌골, 미곡동 : 석현(돌고개)에서 동쪽으로 고개 3개를 넘어서 2km 지점에 위치한 서남향으로 이루어진 마을로서 이조단종대왕 폐위시에 숭흥 안씨들이 금성대군과 연루되어 멸족위기에 이르자 피난차 숨어서 찾아든 곳이었다. 안씨들이 처음와서 개척을 하고 몇 년을 살아가면서 차츰 숙청이 적어져서 옛 고향이 그리워 순흥으로 왕래를 하자니 길을 찾을 수가 없도록 수목이 울창하여 미로라는 말이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밋찔로 변하고 미찌골 또는 미질골이라 하다가 임진왜란시에 각 성씨들이 피난차 임주하여서 보니 산천도 수려하고 인심도 순박하면서 물맑고 시초가 풍부하니 이곳에 거처를 정하고 성황당을 모시니 미곡동 성황지위라고 하여 미찔아닌 미곡으로 주민들이 애칭하고 있다.

    되매기 : 미곡 본동에서 500m쯤 떨어진 동쪽에 산재한 마을로 서향으로 터진 골짜기로서 옛날에 안씨들이 첫 기착지로서 피난을 와서는 3.4년간 이곳에서 숨어 살다가 보니 옆골인 본동이 더 넓고 길어 거처를 옮겨 살다가 전 주거지의 정정도 버리기는 아까워서 되돌아 밭메기를 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배나무촌 : 배나무촌은 원래에는 계천변 황무지로서 미곡본동에서 300m 상류에 있는 곳으로 독가촌에 안씨만이 살다가 이주한후 일제가 패망하고 난후 화전민과 독가촌민들을 모여 부락을 형성하였든 바 마을 복판에 수백년 묵은 돌배나무 고목이 있어서 그 나무를 중심으로 화전민 촌을 이루어서 살았기에 배나무촌이라 부르고 있다.

    투구봉, 방우재 : 미곡동에서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 모양이 투구와 같은 모양임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투구봉 북쪽에 방우재라는 고령으로서 소천면 고선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옛날에는 보행 대로가 되어서 강원도 지방으로 이어지는 암석령임으로 방우재라 한다.

    수리바위와 상투바위 : 배나무촌에서 서쪽산 기슭에 우뚝앉은 큰 바위가 수리가 앉은 형상같아서 수리바위이고 북쪽산 허리에 우뚝솟은 바위는 10여개가 뽀족하고 상투같다하여 붙여진 바위 이름이다.

    각시봉 : 미곡동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산이나 풍수설에서 비롯된 명산인득 하다. 원래 여기는 장군대좌라는 형국의 명당이 있다하여 풍수들이 많이 다니면서 지은 이름이다.

    아드뱅이 : 이곳은 미곡동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미곡으로 들어노는 길목이며 마을은 산재하여 형서되고 옛날 안씨들이 살다가 자식들을 분가시켜서 아드랑이라는 말이 지금에 와서는 아드뱅이가 되었다.

    봇거리(수진) : 봇거리는 석현1리 입구지점이며 이곳에 보가 설치되어 봇거리로 부르게 되었으며 서동리 탑들 논에 물을 대고 있다.

    한두골 : 미곡동 서쪽에 위치한 활무산으 ㄹ사이에 둔 마을이나 왕두산에서 흘러내린 낮은 산이 한도같아 풍수설로 지어진 명칭이고 적시장군대좌의 명당이 여기에 있지나 않을까하여 사방에 묘지가 산재하여서 미골이라고도 한다.

    음지기 : 음지기는 한두골 북쪽에 위치하고 석현에서는 1km정도 떨어진 동쪽에 있다. 이곳은 골짜기가 길고 음지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돌고개, 석현 : 돌고개는 원래 영월군 상동면에 속한 지역으로서 지금의 석현1.2리 구역 경계지점인 고개가 암석으로된 오솔길이 있어서 사람들이 보행하는 지름길이여서 돌고개라 불리우니 1914년 행정구역 폐합당시 석현2리을 통합하여 춘양면으로 편입되었다. 돌고개 주변에 약 15호 정도의 자연부락이 형성되어 있어 이 마을을 돌고개 마을이라 한다.

 ◆ 춘양면 석현2리(石峴2里)

    ▷ 공수골, 공세동 : 석현리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조선시대에는 세납창고가 있었다. 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고도 하며, 북동쪽 각화산 중턱에 각화사라는 절이 있는데 절에 물을 바치는 골이하 하여 공수골이라 하였다.

    ▷ 부채들, 선평 : 마을앞들이 부채모양으로 펼쳐져 있어 부채들이라 하였다. 돌고개재를 넘으면 바로 보이는 마을이다.

    ▷ 절골 : 신라 문무왕5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각화사가 있어 절골이라 칭했으며, 각화사를 중심으로 동암, 남암(연대암), 북암, 조도암 등 많은 암자들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태백산 사고가 있었으나 해방전에 소실되고 그 흔적만 남아있다.

    각화사 : 공세동 동북방향에 소재한 명산 대찰이다. 신라 문무왕5년(665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이조 철종때까지 아홉 도인이 출세광덕중생하였다하여 사리탑 9존(구부도)가 사찰 경내에 있다.

    태백산사고지 : 조선시대 명종 1년(1546년)에 태백산 사고가 창건되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으나 1907년경 서울대 규장각으로 옮겨지고 그 이후 태백산사고는 소실되었으며, 1988년 봉화군과 대구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사고지가 발굴되었다.

    ▷ 선 바우골 : 큰 바위가 우뚝솟아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앉아 쉬어가기도 하는 바위가 있다하여 선 바우골이라 칭하였다. 각화사 우측에 위치한 곳으로 문수암, 아람암 등 암자가 있다.

◆ 춘양면 애당1리(艾堂)

    ▷ 배고개 : 석현리와 애당리 경계에 있는 고개로 이곳에 큰 돌배나무가 있어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쉬어가는 곳으로 배고개라 불렀으며, 이 부근을 배고개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 대티 : 애당본동 수진마을과 배고개 사이에 있는 마을로 대나무가 우거진 고개라 하여 대티 또는 죽티라고 불렸으며 농경지가 편편하며 마을의 뒤쪽은 높은 산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 중앙을 가로질러 남북으로 춘양-영월간 88번준국도가 지나고 있다.

    ▷ 수진 : 마을앞에 큰 냇물이 흐른다하여 물나들이란 뜻으로 수진이라 불렸으며, 서벽리에서 발원하는 운곡천과 애당천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애당초등학교가 있어 애당리를 비롯하여 도심리, 석현2리 지역의 초등교육을 담당하고 있으나 지금은 학생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 마을은 버스정차지로서 애당.도심지역의 교통중심지로서 역할을 하여 식당, 잡화점 등이 다소 번창하였으나 지금은 예전 같지 않다.

    ▷ 쑥댕이, 수댕이, 애당리 : 본래 봉화군 상동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석현리 일부를 병합하여 춘양면 애당리가 되었다. 이곳에는 마을의 신을 모셔놓고 마을의 안녕을 빌던 사당이 있었는데 그 주위로 쑥들이 무성하여 쑥으로 싸인 사당이란 뜻으로 애당이라 불려지게 되었으며, 당은 1970연대말에 박대통령 시절 미신타파 정책의 일환으로 철거되고 지금은 넓은 공터에 당숲이 우거져 지나가는 행락객들의 더위를 식혀주고 있다. 이곳 주변에는 당숲과 연계하여 양어장과 식당이 조금 들어서 있다.

    ▷ 아랫장바우, 하장암 : 애당리 북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이 마을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병자년에 아주 심한 홍수와 번개로 바위가 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로부터 장암이 유래되었다 한다. 서벽4리 지역을 상장암, 이곳을 하장암이라고 부른다. 마을 앞을 흐르는 운곡천 건너편에 있는 도심2리 죽터마을을 들어가는 입구마을이기도 하다.

◆ 춘양면 애당2리(艾堂)

    ▷ 동이정, 백평 : 애당2리 중심에 있는 마을로 큰 배나무가 있어 동지정이라 불렀다 하기도 하고, 동백나무가 많아서 백평이라고도 불렀다. 이 곳은 장붓골, 석문동, 참새골로 나뉘어 지는 분기점으로 마을이다.

    관기동(관터) : 강원도 장사꾼들이 장을 보러 다니는 길목으로서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동전 몇 개를 두고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호암동 : 이곳에 호랑이굴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터 : 백평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사람들이 여행을 하다가 날이 저물거나 피곤하면 쉬어가던 곳으로 조선새대에는 원이 있었으며, 지금은 흔적만 있고 이 근처에는 집 한채만 홀로 남아 있다.

    참새골, 진조동 : 동이정에서 북쪽으로 강원도 경계에 이르는 곰넘이재까지 전체를 참새골이라고도하며, 동이정에서 북쪽으로 약 1km지점에 월노방이 있고, 4km지점에 진조동, 진조동 북쪽에 실두동이 위치하며, 실두동을 지나 강원도 경계에 곰넘이재가 있다. 참새골은 옛날에는 약수와 같은 참샘이 있는 연유라고도 하며, 혹은 북쪽에 있는 산이 참새가 날아가는 형국으로 참새를 닮았다고 하여 참새골이라고도 하였다한다. 또 다른 유래는 이 골짜기에서 쇠를 만들었는데 그 쇠가 참으로 품질이 좋아서 참쇠골이라 하던 것이 세월이 흐르고 구전되면서 어원이 변하여 참새골로 불리워지게 되었다고도 한다. 참새골은 골이 깊고 숲이 우거져서 여름에는 행락객이 많이 찾아오고 있으며, 계곡마다 아련한 전설을 담고 있어 역시 골이 깊으면 품고 있는 사물도 많다는 옛말을 실감나게 한다.

    계곡동 : 달이 밝을 때 계수나무가 비치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암소바위 : 옛날 마고할머니가 암소등에 돌을 운반하여 성을 쌓는데 돌을 싣고 가던중 성이 완공되어 싣고 가던 돌을 내려놓은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큰 바위가 양쪽에 있고 그 사이로 맑은 계곡수가 흐르는데 가만히 귀기울이면 암소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밤나무골 : 옛날에 밤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지명인데 밤보다는 도토리로 연명하는 시절에는 도토리나무가 많았지 않았나 싶다.

    월로방 : 동이정에서 북쪽으로 약 1km지점에 위치하며 진조동으로 가는 길목이다. 지형이 반월형으로 되어 있어 월노라 부르게 되었다.

    실두동 : 옛날 스님이 콩을 가지고 고개를 넘어가다가 쉬다가 콩을 잃어버린 곳이라하여 실두동이라고 한다.

    곰넘이재 : 실두동에서 임도를 따라 계속 북쪽으로 가면 강원도경계에 이르는데 이고개를 곰넘이재라 한다. 곰넘이재는 백두대간 선상에 있으며, 능선 약 100m 전에 샘이 있는데 옛날에는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다하나 지금은 낙엽이 쌓여 먹을수 가 없다. 이 곳은 백두대간 종주반들이 탈출퇴로로서 많이 이용되고 있다. 곰넘이재에서 좌측 백두대간능성네는 구룡산이 있으며, 우측으로는 신선봉(삿갓봉), 차돌배기, 태백산을 통하는 백두대간 등산로이다.

    석문동 : 동이정에서 세갈래길중에서 중앙의 길을 통하여 약 1km 지점에 석문동이 위치하며, 마을입구 양쪽에 큰바위가 우뚝 솟아있어 그 사이로 사람이 겨우 통행할 수 있을 정도로 석문역활을 한다고 하여 석문동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천연의 요새지로 전쟁시 피난을 하던 곳이다. 정감록의 전국십승지 중의 한 곳이라 전해지며, 자개동 석문에서 석문동이 유래되었다 한다. 지금은 석문동계곡 입구에 15가구 정도가 계곡을 따라 산재해 있으며, 그 안쪽에는 민가가 없으나 해방이후에도 수십가구가 살던 집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석문동을 통하는 태백산에 이르는 등산로가 '98년도에 정비되어 백두대간 종주반이나 태백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종종 이용하고 있다. 동이정에서 약 5km 지점에 석문바위가 있다.

    절타리골, 절터, 절골 : 석문동계곡 안쪽에 위치하며 옛날 큰절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석문동계곡에서 경치가 가장 뛰어나며, 제2석문이 위치한 곳이다.

    장붓골, 장부곡, 장부동 : 동이정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농로를 따라 약 1km 정도가면 장붓골에 이르며, 이 마을에 노루마당이라는 혈이 있었다고하여 장부곡이라 했다고 하며, 그 위쪽으로 올라가면 산 모양이 노루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한다. 옛날에는 큰 절이 있었다고 하며, 화전민들이 많이 살았으나 많이 떠나고 지금은 몇가구만 살고 있다. 장붓골에는 자작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봄에는 자작나무 물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다. 이곳 장붓골 뒷산을 통하여 각화산과 각화사로 가는 산길이 있다고 하나 오랫동안 인적이 끊켜 길을 찾기 어렵다 한다.

◆ 춘양면 도심1리

    새터, 신기 : 조선말기에 김영김씨가 와서 새로 개척한 터라하여 새터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배고개재에서 내려다보면 운곡천 강 건너에 있는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삼밭골 : 화전민들이 삼(대마)을 많이 재배하여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주치밭골 : 주치(약초)가 많이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병풍바위골 : 석현리와 도심리 경계인 운곡천 좌우의 계곡이 병풍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배나무골 : 옛날에 큰 배나무가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숯터골 : 옛날에 숯을 굽던 곳이라고 한다.

    용소 : 명당자리라고 장군터를 잡았으나 묘를 잘못써 장군이 죽자 용소에서 용마가 나왔으나 말을 탈 사람이 없어 용마가 용소에서 죽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구억마, 구석마, 구석마을, 꿩마, 우촌 : 도심1리 중심에 있는 마을로 춘양면 학산리로 통하는 당재로 올라가는 산밑 구석진 곳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구억마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당재 : 옛날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밑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여서 며느기는 물을 독에 채우다 쓰러져 죽자 동네사람들은 며느리의 우너을 들어주기 위하여 당재를 넘을 때마다 작은돌을 쌓아 주었다 한다.

    독바위골 : 마을사람들이 부근에 옹달샘응 떠 큰 바위밑에서 칠성을 드린 곳이다.

    감동골, 감나무모태, 현동 :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의 백씨 경암 류운룡이 지금의 감동골에 움막을 짓고 부모님을 모시고 피난을 하면서 뒤곁에 감나무를 심었는데 큰나무가 되어 감나무모태(모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산이 현자모양으로 이리저리 틀며 내려왔다고 하여 현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하며, 검을 현자를 쓰고 있어 농사가 가물어 짓지 못했던 곳이었으나 경암선생의 공부터에 작은 돌을 세우고 기우재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하여 감동곡이라 했다는 전설도 있다.

    겸암할배공부터 : 조선 중종 33년(1539) 안동 풍산 하회에서 출생한 류운룡의 자는 응견이고 호는 경암이며 본관이 풍산이다. 어릴적부터 총명했던 경암은 퇴계선생 문하에서 수락하였다.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아 과거에는 일체 응시하지 않은 채 학문과 가사에만 열중하던 경암은 34세때인 선조 5년(1572) 학행이 뛰어남과 가문의 음덕으로 인동현감에 발탁됨으로써 관직에 나가게 되었으며, 풍기군수로 재직시 선정을 베푸는 한편 전란중에 공물을 마련하여 조정에 보내어 큰 공적을 인정받아 정3품 통정재부로 승진되어 원주목사로 영전되었다. 임진왜란때 감동골 후미지고 외딴 곳에 피난하여 움막을 짓고 돌로 단을 쌓아 역학을 하면서 공부에 열중하고 축지법을 연마하였다 석단이 있는 곳은 국구일념으로 치성을 올렸던 곳이며, 또 기우제를 지내기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겸암 류운룡(1539-1601)선생과 아우 서애 류성룡대감의 종택은 안동군 풍천면 하회마을에 있다.

    도심곡 : 부족국가시대에 고구려국의 왕성이 있었던 도심리는 강원도 영월군으로 넘어가는 도력현(도래기재)과 태백산, 황지, 삼척으로 연결되는 고직령 옛길과 가붓재를 넘어 봉성과 봉화로 가는 길과 춘양시장이 있었던 장동을 거쳐 소천 삼동으로 통하는 교통요지로서 삼국시대부터 도심역이 있었고 규모는 중마소마 합해서 10필 내외었으나 역원은 60명 정도로 전해지고 있다. 도심은 골이 깊어 도심이라 했는데 그 후 인심이 좋다하여 도심이라 부르게 되었다. 본래는 안동군 춘양면의 한 지역이었는데 고종 10년 봉화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도심리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후 1.2.3리로 행정구역이 조정되었으며 현재는 새터, 죽터, 황터로도 많은 사람들이 부르고 있다.

◆ 춘양면 도심2리

    죽터, 죽기 : 부족국가시대 형성된 마을로 서쪽산 기슭에 대나무밭이 있어서 죽터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도 양지터 뒤 언덕에 대나무군락지가 남아있다. 이 마을은 옛 상인들이 봉성으로 넘어가는 기목이었는데 "인심은 도심이요, 서벽이 죽터라" 즉 인심이 야박하다는 말이었으나 그후 인심이 좋아졌다고 한다.

    둔지 : 이공의 농경지가 주위의 농경지보다 높은 언덕에 위치해있다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여시바우 : 옛날 뒷골앞 바위틈에 백여우가 살았다하여 유래된 이름으로 여시바위 앞들에 곡식이 잘되면 여시가 돌봐주어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양지터(양지마을) : 죽터마을 중앙에 시냇가를 중심으로 해서 북서쪽에 있는 길다란 언덕밑에 양지바른 곳을 양지터라 부르는데, 이 망르에는 선성김시가 많이 살고 있어 그 김씨를 일컬어 양지김씨라 부른다.

    음지터 : 죽터마을 양지터 길건너 반대쪽을 음지터라 하는데, 이 마을에는 김해김시가 주로 살고 있어 그 심씨를 일컬어 음지김씨라 부른다고 한다.

    정첨지 미골 : 옛날부터 정첨지 묘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물푸레들 : 농경지 부근에 물푸레나무가 많아 유래되었으며 현재는 경지정리 사업으로 물푸레나무는 거의 없다.

    갈밭너(피밭골) : 갈대가 많아서 갈밭터라고 하며, 전쟁때는 피난민이 모여와 살던 피난터였다고 한다. 또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에 명당터가 있다고 한다.

    물부리터 : 죽터마을 뒷골에 위치하며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마을에 꼭 비가 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200평정도 바닥에 5∼6m 높이의 석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위 사이에서 흐르는 물은 아무리 심한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화방, 꽃뱅이 : 도심리에서 봉성면 창평리로 넘어가는 갑옷재 밑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꽃뱅이에 구연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하루는 도승이 쉬었다가면서 그 곳에 화심혈의 명당이 있으니 찾아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 곳을 꽃뱅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실제 지형도 절골, 아쿠봉, 문수산이 꽃잎처럼 둘러싸여 있는 오목한 골의 한복판에 아담한 봉이 우뚝 솟아 있어 흡사 화심(화방)처럼 생겨서 신기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갑옷골, 가부골 : 옛날 장수가 싸움을 하다 옷을 묻고 갔다하여 갑옥골이라 불리기도 하고 부자가 난다는 부자터에서 부자가 난다하여 가부골이라고도 한다. 현재 갑옷골로 더 많이 불리어지고 있다.

    수정골 : 갑옷골 골안에 작은 골인데 육각형의 수정이 많이 나와 수정골이라 하며 현재에도 소량의 수정이 나오고 있다한다. 예전에는 이 골에서 호랑이굴이 있어 가끔씩 출몰하였다 한다.

    절골 : 절터가 있어 유래되었으며 절앞 밭에는 짐승이 먹을 정도의 곡식이 될 뿐 농사가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곳에 남아있던 암자를 화방으로 이전하여 문수암으로 부르고 있다.

    아쿠봉 : 문수산 큰봉에서 남족으로 보면 봉우리 세 개가 우뚝 솟아 있는데 봉우리 전체가 기암절벽으로 형성되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에 올라보면 아이쿠하는 감탄사가 절로 다온다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늘버디, 늘버징이, 노류촌 :  죽터 남동쪽 넓은 바닥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앞에 늙은 수양버들이 서 있어서 늘버딩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이름으로까지 부르게 되었던 이 오래된 수양버들은 베어지고 현재 남아있지 않다. 마을 앞으로 운곡천이 흐르고 있다.

◆ 춘양면 도심3리

     황터, 황기 : 부족국가가 형성되던 시기에 구리왕이 나라를 세우고 살았다하여 황터라 부르게 되었다. 약 198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 앞 숲에 당집이 있었고, 그 안에는 구리왕의 위패와 구리왕에 대한 내력을 적은 기록문과 높이 약 15cm,  길이 약 20cm 정도 크기의 구리로 만든 말 두 마리가 함께 보존돼 있어 매년 음력 대보름이면 마을에서 나는 곡식으로 5일간 근신한 제관들이 제사를 지내왔었는데, 구리로 만든 말 두 마리는 분실되었고, 위패와 기록문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당집에 불을 놓아 소실되었다. 그 후 동네사람들이 구리왕 유적이 없어진 것을 몹시 아쉬워하고 있던차 82년도에 황터마을내 고층계에서 기금을 모아 옛날 당집자리에 비석을 세워 다시 옛 유적을 보존케 되었는데 그 비문에는 "구리왕위비묘기성황위"라 적혀있다. 그리고 황터 북동편 소라리로 넘어가는 재 이름이 성재이고 그 잿마을에 직경 20cm 정도(인두석) 강돌을 주워다 석성을 쌓았던 유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아도 구리왕 전설의 흔적이 엿보인다. 또한 이 지방 전설에 의하면 구령왕국이 대발병삼십입하여 벌소라국하다는 기록이 신중동국여지승람에 있는데 그 구령국은 서벽2리 금정골안 고직령 밑 골짜기에 있었다고 하며, 소라국은 서벽리에 있는 소라리라는 동명으로 미루어볼대, 소라리 아니면 황터에 부족국가가 있어서 두나라가 싸운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두레굴 : 황터 마을 위쪽으로 500m에 위치하며 큰골이라는 뜻으로 두레골이라 불러져 왔으며, 중간에 제1폭포와 제2폭포가 위치해 있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적어지게 되었다. 또한 고려시대에 큰 절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주춧골등 절터만 남아있다.

    배나무들 : 본 이동에서 남쪽 300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들로서 옛날 큰배나무가 들가운데 있어서 일을 하다가 쉬는 곳으로 이용하였다하나 지금은 모두 논밭이 되어있다.

    장고개, 성재 : 본 이동에서 북쪽으로 200m 지점에 위치한 야산으로 서벽리와 연결되는 고개로 소부족 국가시절에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서벽천에서 물돌을 운반하여 성을 쌓았다고 전해지며 현재 약 60m 정도의 성형체가 남아있으며 일명 장고개라고 하는데 장수가 태어날 장소라고 하여 붙혀진 이름이기도 하며,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꼭 침을 뱉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성취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나무들 : 황터와 약물레기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들을 개간하기 전에는 신나무가 있어서 붙혀진 이름이나 지금은 신나무는 없고 모두 논밭으로 변했다.

    고장들, 고려장터 : 옛 고려장터로서 이것을 증명해주는 개석과 웅덩이 그리고 고분이 남아있었는데 1970년대에 도굴꾼에 의해 그릇, 숱가락 등 유ㅜ물이 도굴되고 지금은 두께 50cm, 넓이 1평 정도의 커다란 돌과 움푹파인 웅덩이가 옛 고려장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람들이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약수동, 약물내기 : 도심3리 문수산 기슭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부터 약수가 나서 옻오른 사람이 바르면 효험이 많아 유명해진데서 유래되었으며, 현재도 양은 적으나 약수가 솟고 있어 찾는 이가 있다.

    물부리터 : 문수산 8부능선 정도의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제사의식을 살아있는 개를 잡아가서 그 자리에서 개의 목을 잘라서 머리를 제물로 올렸다고 한다. 이곳에는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곳으로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꼭 비가 내린다고 전해진다.

    물미, 수산 : 도심3리 입구에 있는 마을로서 동네 뒷산 지형이 기러기가 물을 보고 내리는 평사낙안의 형상이라 하고, 뒤쪽에 있는 들을 갈밭들이라 하는 이름도 기러기와 관계가 있다.

◆ 춘양면 서벽1리

    꽃마, 골마 : 서벽리와 두내로 통하는 삼거리에 위치한 마을로 문수산에서 바라보면 마을이 꽃봉우리같이 생겼다하여 꽃마라고 부르며 꽃마가 변하여 골마라고 한다.

    수리봉 : 절골 뒷산 정상봉으로 닭이 홰를 타고 올라가는 형국을 한 오르등을 바라보고 있는 산이다. 홰에 올라있는 닭을 채어가려고 노려보고 있는 독수리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수리봉이라고 한다. 항일 의병들의 참호인 석성이 있다.

    말밭둔지 : 두내 입구 좌측편에 있는 들이다. 들판의 형상이 곡식을 되는 말(두)과 같다고하여 말밭둔지라고 하며, 또 마귀 할머니가 부석사를 지으려고 큰 말에 돌을 싣고 가다가 말밭둔지에 돌을 내려 놓고 갔다고 하여 발밭둔지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큰들 : 서벽중학교 앞에 잇는 들이다.

    거리못 : 골마입구이며 마을거리에 있다하여 거리못이라고 한다. 서벽지서와 서벽초등학교가 있다.

◆ 춘양면 서벽2리

    서벽, 새벽 : 서벽리의 중심마을이며 북족에는 태백산, 동쪽에는 시루봉, 서쪽에는 옥돌봉, 남쪽에는 문수산으로 둘러쌓여 있는 천하대지로서 서족 옥돌봉에서 아침햇살에 옥돌이 반사되어 찬란한 빛을 비춘다고 하여 서벽리라 부르고 있다. 마을은 풍수지리학상 배(주)의 형국이이며 마을 뒤 주령이 지네형이러서 우물을 파거나 뒷산에 묘지를 쓰는 것을 금해 왔다. 예로부터 큰 인물을 많이 낳으며 진성이씨의 참판과 근세에는 국회의원으로 자유당 원내총무를 역임한 정문흠(제2대∼제4대)씨도 이마을 출신이다. 정문흠의원은 당시 혼탁한 정치상황에서도 청빈하기로 이름이 높았으며, 봉화군의 대표적 수리시설인 창평저수지와 금봉저수지를 축조를 국책사업에 반영하여 창평, 동양, 유곡들의 가뭄 걱정이 없도록 하여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은덕을 기리는 사람들이 많다.

    금당골 : 서벽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이곳에 큰 절이 있었는데 그 절 이름에 따라 금당골이라고 하였다고 하며, 미상년대에 소실되고 현재 주춧돌등 석재 일부만 남아있고 구사찰 아래족 약 2.5km 지점에 금륭사라는 암자가 현존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 금이 많이 난다고 하여 금당골이라고 한다는 말도 있으며 약 1960년대까지 금광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광되었다.

    구룡곡, 구룡배미 : 금당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였다고 하여 구룡곡, 구룡배미라고 한다.

    성지바위골 : 넓이가 약3평 정도 되는 넓직한 바위가 있으며 옛날에 선인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춤추고 놀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 바위 밑에는 약수가 사철 끊이지 않고 있으며 피부병에 좋다고 한다.

    벽초정사 : 정문흠씨가 국회의원 재직시 자기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로서 정자앞에 연못이 있었으나 도로확장공사로 매몰되고 현재는 정자만 남아있다.

    구봉곡, 굽은골, 구분골 : 마을 뒷산 구봉산이 9개의 봉우리로서 그 구봉산아래 마을이라고 하여 구봉곡, 구분골이라 부르고 있다.

    신재, 신재물 : 마을 서쪽 약 2km에 위치한 나지막한 고개로서 옛날에 신부가 초례를 치른후 신행길에 가마꾼의 부주의로 신부가 굴러 떨어져 죽었다고 하며 그 후 이곳을 신재 또는 신재물이라고 부르고 있다.

    조재당골 : 마을 북쪽에 위치한 골짜기로서 예로부터 숲이 우거지고 산새들이 많이 서식하여 조잘데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래기, 도역 : 서벽 서북쪽 약 1.5km쯤되는 마을로서 경상도와 강원도를 연결하는 역이 있던 마을이라고 도역이, 도래기로 부르게 되었다. 이 일대가 과거에는 큰 효용이 없는 농토였으나 지금은 사과재배기술이 도입되면서 사과농사로 고소득을 올리는 농가가 많다.

    도래기재, 도역령 : 마을 뒤쪽 강원도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많은 문물이 경상도와 강원도간에 교류되었으며 1950년대까지 상동 중석광업소돠 금정금광이 융성하여 광산물과 임산물을 운반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도래기터널, 도역터널 : 광산물과 임산물의 유통과 강원도로의 교통을 위하여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개설한 석조터널(약150m)로서 붕괴위험이 많아 1985년경부터 터널위로 도로를 개설한 후 폐쇄하였다. 지금은 터널 입구에 소공원과 정자 등 쉼터가 조성되어 여름철이면 많은 행락객들이 쉬어가고 있으며, 터널에서 부는 바람은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낄 정도이다.

◆ 춘양면 서벽3리

    광춘 :  두내안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아무리 못사는 사람이라도 이곳에 와서 살면 밥을 굶지 않는다고 하여 광춘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그러나 돈을 많이 벌려면 이 곳을 더나야만 한다고 전해오고 있다.

    옥돌봉 : 마을 뒷편에 있는 옥석산(1076)에 있는 봉우리로서 옛날 옥돌봉에는 옥돌이 있어 그 빛이 멀리까지 비친다고 하여 주위일대의 동리이름을 서벽으로 불리게한 봉우리이다. 날씨가 아주 맑은 날이면 멀리 예천에서 봉우리가 보인다고 하며 이 봉우리가 보이는 날에는 예천에 큰 화재가 발생한다고 한다.

    독박골 : 바위가 있는 골에 옛날 도둑이 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재골 : 서벽3리에서 서벽2리로 넘어가는 고갯길로서 옛날에 길을 처음 개통한 후 여자가 이 길로 시집오다가 가마에서 내려 재에서 쉬다가 죽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그후에는 길이 없어지고 말았다 한다.

    거시래, 거실 : 두내 골자기에 있는 마을로서 옥돌봉 밑의 옥계가 동이 틀 무렵 날개를 치며 마을로 내려왔다고 하여 거시래 또는 계시래라고 부르다가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시래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두내 : 마을지형이 말(두)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두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말안이라고도 하였으나 변하여 두내라고 부른다. 두내에는 약수탕이 있어 피부병 환자들이 많이 찾아들어 마을에서 약수탕을 묻어버려 잊혀져 왔으나 1984년 당시 극심한 가뭄으로 물줄기를 찾다가 다시 발견되어 주변에 소공원 조성을 하며 개발하게 되었다. 수년전에 약수탕에서 문수산 밑으로 나있는 임도와 바로 연결되는 다리가 준공됨으로 울창한 소나무 수림 임도와 연계되어 좋은 관광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문수산 : 도내 마을 서편에 있는 산으로 옛날 천지가 개벽할 때 문수산 봉우리 부분이 문폭만큼 남아 있었고 나머지는 물이 고여 있었다고 하여 문수산이라 일컬어진다.

    새마을 : 1969년 정부에서 화전민 이주 정착사업으로 주택 7동을 짓고 화전민 17세대를 이주시키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서 새마을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못둔지 : 옛날 큰 저수지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못이 매어져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 춘양면 서벽4리

    새마을 : 1968년 산재된 화전민 이주정책에 따라 경사가 완만한 이곳 임야를 개간하여 집단부락을 형성한 마을로서 풍수지리상으로는 달구벌(닭이 노는 곳)이라 한다. 이 마을은 문수산 아래에 위치하며 문수산을 오르는 임도가 개설되어 있다.

    돌겨봉 : 삼베를 돌려 잦는 삼돌겨 같이 생긴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새마을 뒤에 위치하고 있고 문수산앞에 있는 산봉우리이다.

    장암, 장바우 : 서벽리와 애당리에 걸쳐 있는 마을로 장승바뒤가 세 개 있었다 한다. 애당가는 길에 바위 하나가 있고 다른 하나는 냇가에 있었으며 장승바위가 있다고 장바우, 장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상장암 : 서벽리와 애당리에 걸쳐 있는 마을로 장승처럼 생겼다는 바위 즉 장승바위 위쪽 서벽리 지역을 상장암, 애당리 도심2리 입구 마을을 하장암이라고 한다.

    양수봉 : 옛날 봉수대가 있던 봉우리이며 깃발을 꽂았다고 한다. 사방이 확 트이고 멀리 바라볼 수 있다.

    불당골 : 애당1리와 서벽4리 상장암 경계부근에 위치한 계곡이며 옛날에는 절이 있었고 절터에 바위가 있어 지금도 치성을 드리고 있다.

    장바우골 : 구정에 의하면 장수바위가 있다고 해서 장바위골이라 하였고 장수바위가 있는 곳에 절터가 있다.

    소라리 : 옛기록에 의하면 구령국이 "군사 30명을 동원하여 소라국을 토벌하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소라국이 있었던 마을이라하여 소라리라 부륵 되었다고 한다.

    성제 : 도심3리 경계지역의 조그마한 산에 있는 고개로 옛날 소라왕이 소라국을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돌로 쌓았던 성이 있는 곳이라 하여 성제라 하였으며 지금도 흔적이 남아있다.

    먹위골, 머위골 : 풍수지리상으로 금계포란형의 형국이며 닭이 알을 품고 있다가 모이를 먹으러 내려온다는 곳이다.

    소라들 : 소라왕이 살고 있던 앞들을 소라들이라 한다.

    불밋골 : 서벽리 남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마을 형태가 풀무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춘양면 우구치리

    새터, 신기 : 하금정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인근에 금.은.동 광산이 많이 생겨나면서 이곳에 종사하는 광부들이 새로운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쉰팽이골 : 시기는 알수 없으나 원시광산에서 갱구가 무너져 광부가  몰살을 당하였는데 그 인원을 정확히 알 수 없어 당시 국상을 당하여 쓰고 다니다가 갱구밖에 벗어놓은 50여개의 패랭이 수를 보고 죽은 인원을 추정하여 50여명이 죽었다하여 쉰피리골 또는 쉰패랭이골이라고 하였다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은 광구 흔적이 남아있다.

    상금정 : 금정이라는 명칭은 일제시대에 광산명칭을 일본인들이 금정광업소라 칭하였으며, 상.하로 나누는데 금정광업소가 있는 곳을 상금정이라하고 우구치 입구 자연부락을 하금정이라 한다.

    우구재, 우구치 : 본래 영월군 상동면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인 우구재 밑이 되므로 우구재 또는 우구티라 하였으며 재를 넘어가는 골짜기 모양이 소의 입모양이라 하여 우구티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춘양면 서벽리 일부를 병합하여 우구치라아혓으며 봉화군 춘양면 에 편입되었다.

    상시장 : 금정광산이 한창 번성했던 1933년 일제시대에는 상시장을 중심으로 인근 촌락에 이삼천세대 이상이 살았다하며, 이곳에서 생활필수품이나 광산에 필요한 공구등을 파는 상설시장이 생겨났으며 상시장과 하시장은 우구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대구촌, 변전소골 : 일제시대때 유래된 말로서 전국 각지에서 광부들이 많이 모여 살았는데 대구사람드링 가장 많이 모여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호 : 금광르 뚫는 숭서를 말하는 것으로 사호와 칠로에서 많은 금이 나와서 붙여진 지명이며, 바깥에서 보면 두 개의 갱이 있으며 안에 들어가서는 여러갈래로 갈라져 있다.

    삼동산 : 상금정에서 약 8KM 거리에 있는 해발 1,180M의 산으로 산능선을 경계로 경상도와 강원도로 갈라지며, 10여년전까지 998지방도로서 강원도 상동으로 가는 버스노선이 있었으나 승객이 감소하여 버스노선이 폐지되었다. 조제를 거쳐 강원도 하동면쪽으로 지방도 노선이 변경(현재 88준국도)되고 2차선으로 포장이 되면서, 이곳은 농어촌도로(면도 제101호)로 하향조정되었다. 삼동산에는 현재 고랭지채소(무우, 배추)가 경상도  지역에 7.2 ha, 강원도 지역에 35ha가 경작되고 있으며, 봉화군농촌지도소에서 우량감자종자를 보급하기 위해 감자채종포를 설치.연구하고 있다. 70년대초 대공취약지 화전민이주정책으로 13동 집단주택이 경상도지역에 건축되었으나 지금은 농막으로 사용하고 있다.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강원도 상동지역에서 5일장을 보러  춘양면으로 많이 나왔으나 이제는 강원도 지역의 도로여건이 더 나아 춘양지방과는 교류가 없다. 하루 두세번 다니던 완행버스로 인해 산촌민들의 숱한 애한을 품은 삼동산 아흔아홉 구비도 이제는 그 기능을  다한 듯 하다.  

    하금정 : 옛날에 이곳에 사금이 많이 났다고하며 또한 금이 샘같이 많이 난다고하여 금정이라 하였으며 상.하금정으로 나뉘는데 아래쪽 마을을 하금정이라 한다.

    샘골 : 광산이 여러곳이 있어 물이 좋지 않았으나 이골은 물이 맑고 좋아서 샘골이라 하였다.

    구점골 : 삼국시대부터 이곳에 광산이 형성되어 금.은.동이 났다고 하는데 특히 은이 많이 생산되어 이곳 점포에서 현물을 매매하였으나 구점골이라 불렀다 하나 지금 인가는 없다. 구점골에는 200년된 면 보호수(소나무)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이곳 우구치 발전을 위하여 20여년동안 노력하시다가 돌아가신 정석범 이장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특히 이곳 교량밑에는 우구치계곡 중에서 야영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여름철에는 행락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조제 : 경상도와 강원도 영월군과 접경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이 마을 중간을 흐르는 내를 중심으로 경상도 조제와 강원도 조제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두마을을 합쳐서 조제라 한다. 조제에는 봉화군에서 6000여 평의 부지에 도계 소공원을 조성하였다.

    가는골 : 경상도 조제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길게 늘어진 좁은 골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화전민 철거로 지금은 거의 떠나고 몇집만 살고 있으며 햇빛이 잘들어 아늑한 곳으로 뒷산은 군유림이며 강원도와 경계지역으로 장래 활용가치가 높은 곳으로 판단되어 봉화군에서 수년전에 매입하여 행정재산으로 관리하고 있다.

    와흥 : 구전에 의하면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고 하여 와흥이라고 불렀으며 골이 깊고 넓으며 사방으로 높은산에 둘러쌓인 마을로 지금은 한농복구회라는 단체가 모여살고 있으며, 이 곳 진입로는 강원도와 경상도의 경계로 와흥마을을 가자면 촌각에도 강원도와 경상도를 여러번 왔다갔다하여야 한다. 그리고 와흥입구에는 호박소가 있는데 우구치지역중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

    노루목 : 옛날에는 장터벌이라고도 불렸으며, 이곳이 한창 흥성할 때에는 아침밥을 지을 때면 쌀뜨물이 30여리를 이어졌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큰 촌락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진터밭 : 임진왜란때 의병들이 왜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진을 치고 오랫동안 거주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띠밭 : 비가 올 때 띠라는 재료로 우의를 만들어 �었는데 띠라는 풀을 였어메어 어께에 걸치고 다년으며 띠라는 물이 많아서 불려진 지명이다.

◆ 춘양면 소로1리

    방전, 방지밭 : 36번 국도와 88준국도가 갈라지는 삼거리 지점으로 춘양면의 입구마을이다. 예로부터 교통이 여러방면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마을이 형성되었다하여 방지밭이라 부르게 되었다 옛날부터 법전면 소로리였으나 1973년 11월 1일 행정구역이 춘양면 소로리로 변경되었다. 방지밭 교량을 장동교라고 하며, 삼척봉과 남양홍씨 제궁이 있다.

    삼척봉 : 고려 성종때 삼척고을에 군수로 임명되어 가던 강릉최씨가 있었는데 지금의 법전면 수천거리를 지나 삼척을 향해 가던 도중 이상한 모양을 하고 홀로 우뚝 솟은 독봉에 닿게 되었다. 그 모양이 하도 이상하게 생겼으므로 봉명과 주인을 알아오게 하였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사또일행이 봉앞에 엽전 세푼을 던져 그 봉을 사게 되었는데 그 후 세인들이 삼척군수가 엽전 세 푼을 주고 산 것을 기념하게 위해 그 봉을 가르켜 삼척봉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삼척봉은 춘양면 소로1리 방전에 있으며 일명 독산이라고도 부른다. 삼척봉 기슭에는 남양홍씨 재사가 남아 있으며, 삼척봉 위에는 작은 정자가 있다. 이 독산 바로 앞에는 운곡천이 유유히 흐르며 약 100M 전방에는 36번국도가 지나고 있다. 물고기가 풍부하며 맑은 운곡천과 아담한 독산, 그리고 그 기슭의 남양홍씨 재사는 한폭의 그림을 연상하여 36번 국도를 통하여 동해안으로 가는 관광객들의 눈길을 한번쯤 잡아 뒤돌아 보게 한다.

    남산편 : 춘양 소재지인 의양리가 번창하면서 도로를 따라 남산편쪽으로 인가가 생기면서 형성된 마을로 의양1리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인접하고 있어 의양1리 일부지역까지 합쳐서 남산편이라 칭하고 있다. 남산편에는 경북북부지방과 가원도 지방에서 생산되는 생약을 수집하는 약초상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본소로 : 소로리의 본마을인데 고대 부족국가의 성립기에 소로국이 있어서 소로라 한다. 구전에 의하면 도심왕이 "대발병삼십하야 벌춘양할 때 대파석교지남"이라 하여 석교는 춘양면소재지에서 본소로로 들어가는 돌다리라 전하고 있다. 한편 본소로 동쪽 산에는 옛성터가 있으며, 본소로 중간으로 영동선 철로가 있어 하루에도 수십회의 열차가 기적소리를 울리면서 무연탄과 화물을 실러 나르고 있다.

◆ 춘양면 소로2리

    관석 : 춘양역 동쪽으로 재를 넘어가면 관석마을이 있다. 이 마을 뒤에는 절터가 있는데 그곳에 관석암이 있어 관석이라 한다. 마을 앞에 반추봉이란 산봉우리위에 마을의 번창을 비는 돛대를 세워 놓는 풍습이 50여년전까지 지속되었다고 하며, 마을의 형상이 돛단배 모양이므로 돛 없이는 갈수 없고 이 마을의 번영도 없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가매골 : 관석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가마솥처럼 생겼다고 하며 수백년 전에 고양 노인 김생원이 살았는데 그는 점을 잘쳤다고 한다. 하루는 무엇을 이고가는 여자를 보고 점을 맞추어보라고 권하니 김생원이 말하기를 밤이라고 했고, 몇 개냐고 물으니 64개라고 했는데 이유인 즉 서쪽으로 까치가 팔팔나니 64라고 정확하게 맞추어 유명해졌다고 한다. 또한 가매골이 소로 300번지 일대로서 지형이 마치 새색시가 가마를 타고 시집가는 형상으로 되어 있다고 가마골이라고도 전한다.

    방터골, 방기동 : 소로리 30번지 일대로서 검은 바위가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 옛날에 집을 많이 지어놓앗다고 하여 방터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흑석, 거믄돌 : 관석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현재 6가구가 살고 있으며 이 마을에는 3개의 검은 바위가 있었기 때문에 거믄돌이라고 하며 현재는 2개의 검은 바위가 있다.

    샘골 : 거믄돌 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앞에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가뭄이 들지 않는 좋은 샘이 있는 골이라 하여 샘골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현재는 그 샘은 없어졌다.

    객씨골, 객씨곡 : 소로리 90번지 일대로서 흑석 서쪽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며 북서쪽으로는 의양4리와 연접하고 있고, 뒷산에 여자같이 생긴 각시봉이 있어 각시골이라고 불리다가 차츰 변형되어 객시골이라 하였다. 객시골에는 송이버섯이 많이 자생되어 주민소득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