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을 떠나요

문익점과 삼우당

민들레@ 2011. 10. 14. 17:13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과 면화시배지(棉花始培地)

 

  진주-대전간 고속도로를 따라 산청 방향으로 달리다 단성 I/C에서 내려 지리산 중산리 방향으로 500m 가다 보면 국도20호선 우측변에 깔끔하게 단장된 한식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문익점   목면시배유지 면화시배지가 있던 자리에 전시관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사적 108호로 지정돼 있는 이곳 면화시배지(棉花始培地) 문익점이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 함께 우리나라  최초로 목화재배를 시작한 유서깊은 곳이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培養)마을이 이곳의 주소로 그가 탄생한 마을이기도 하다. 문익점의 목화씨 전래(傳來) 고려시대의 옷감 혁명을 불러온 일대 사건일 아니라 우리나라의 산업경제사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오게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문익점[1329-1398] 고려말인 1329(충숙왕19) 경남 산청[강성현(江城縣)]에서 문숙선의 아들로 태어나 1360 문과에 급제하였다. 1363 그의 나이 33 되던 해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배원정책을 써던 공민왕을 몰아내고 충숙왕의 동생인 덕흥군을 왕으로 삼으려는 원나라 황제(순제) 뜻을 거역함에 따라 남쪽지방인 운남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문익점은 귀중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목화밭을 처음으로 구경한 것이다. 고려에는 아직 목화가 재배되지 않아 귀족이나 부자는 명주옷을 입고, 농민 가난한 백성들은 삼베나 짐승털을 옷감으로 사용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문익점은 목화씨를 고려에 가지고 돌아가 널리 퍼뜨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목화가 인도로부터 들어온 얼마 되지 않은 원나라에서는 목화씨나 재배방법의 나라밖 유출을 법으로 막고 있었다. 그러나 문익점은 어떻게든 목화씨를 고려로 가져가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귀양살이가 끝나는 , 문익점은 목화씨를 붓대롱속에 감추고 고려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문익점은 장인인 정천익에게 씨았을 나누어 주고 같이 심었다. 가을에 싹이 것은 10 오직 뿐이었다. 그러나 알이 알이 되고 알이 되어 제대로 옷감이 없어 추위에 떨고 있던 백성들에게 의료(依料) 혁명을 가져다 복음같은 씨앗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事實) 하나가 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훔쳐왔다 것은 사실(史實) 아니라는 주장인데, 정사(正史) 어디에도 목화씨를 훔쳐왔다는 기록은 없다는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는 문익점은 진주 강성현(현재의 산청군 단성) 사람인데 공민왕때 과거에 급제하여…….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본국으로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얻어가지고 와서……” 라고 하여 얻어왔다 표현을 쓰고 있다 한다. 조선왕조 실록에도 훔쳐왔다는 기록은 없고 “………목화씨 10여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왔다라고 기록돼 있다고 하는데, 당시 원나라에서 목화의 국외 유출을 막고 있던 터라 붓뚜껍 신화 만들어 것은 아닐까?  

 

한편, 문익점의 고향인 사월리 배양마을은 왕으로부터 효자리(孝子里)’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마을로, 역시 문익점의 효행(孝行)에서 연유한다. 청도군수로 선정을 베풀고 있던 문익점은 어머니 조씨(趙氏) 부음(訃音) 듣고 즉시 고향에 와서 3년상을 지내는데, 상중(喪中) 왜구가 침입하여 마을 사람들 모두가 도망을 갔지만 오직 문익점만은 어머니 묘소를 떠나지 않았다. 효성에 감복한 왜장은 부하들에게 헤치지말라명하고 마을에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한다. 이에 이성계의 청에 따라 고려 우왕이 효자리라는 이름을 내려 그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게 했다.

 

원나라에서 귀국 역적으로 몰려 10여년 동안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던 문익점은 목화가 급속히 퍼져나감에 따라 공로가 인정되어 다시 벼슬을 얻지만,  이성계 일파에 의해 추진된 농지개혁(田制改革) 반대하다가 조준(趙浚) 탄핵으로 파직되어 벼슬에서 물러났다.  나라가 떨치지 못하고, 공자의 학문이 제대로 전하지 못하며, 스스로의 도가 서지못함을 근심한다 뜻의 삼우당(三憂堂)이라는 호와 정자를 짓고 야인으로 살던 문익점은 조선 태조7(1398)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440(세종22) 목화씨를 가져와 재배 보급한 공이 인정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끝] 

 

 

※이 글은 두산엔진 사보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 여행을 떠나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해여행정보  (0) 2012.07.05
봉화 전통마을  (0) 2011.09.30
세계문화유산 경주 양동마을  (0) 2011.06.23
잘 가꾼 나무들의 모습  (0) 2011.05.08
걷고싶은길.  (0) 2011.01.01